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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

물아일체, 나는 산이 되고 산은 내가 되고!

by 솔물새꽃 2023. 2.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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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악의 가을 하늘은 그윽한 아청鴉靑빛, 내 유년의 강이요 길이다!
설악의 가을 하늘은 그윽한 아청鴉靑, 내 유년의 강이요 길이다!

물아일체物我一體, 나는 산이 되고 산은 내가 되고, 가을 설악의 품에 안겨 나를 다 비우고 그윽한 산내음 가득 담아가려 한다네. 벗이여, 그대의 술잔을 채워주리라. 나는 산에 오면 산의 마음 물의 마음 꽃의 마음 새의 마음을 닮으려 노력하네.

나는 산에 오면 산의 마음 물의 마음 꽃의 마음 새의 마음을 닮으려 노력한다네. 그렇게 새처럼 물처럼 꽃처럼 솔처럼 나를 태초의 나의 성정에 맡겨보려 한다네. 세상으로 가득한 나를 비우는 일이지... 한걸음한걸음 디딜 때마다 비우고 내려놓고 다시 버리는 것이지... 지금도, 그대를 생각하며 내 안에서 무겁게 나를 짓누르는 것들을  한줌한줌 물에 바람에 밤하늘 별게 날려 보내고 있는 것인지 몰라... 이것을 알면 나의 긴 넋두리(자네에 대한 참견이 될까봐 두려우면서도 나는 감히 설악의 밤바람을 마시며 나의 흉금의 밑바닥을 진솔하게 맑게 자네한테 털어놓을까 하오니, 조금 듣기 거북할지라도 오늘밤만은 순순히 나랑 같이 설악의 밤이슬을 털며 걸어보세나...) 를 좋게 좋게 너그러운 맘으로 좋은 방향으로 물에 찰찰 씻어가며 들어주게나.

 

가을 설악을 만나면 산의 향취 그윽한 품에 안기면 나는 산이 되고 산은 내 안에 들어와 나와 하나가 되는 길이 열리네, 나는 비로소 물이 되어 물이랑 흐르다가 바람이랑 울산바위 위에도 앉아 노닐다가, 심심하면 비룡폭포 앞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물이랑 또 놀다가 날다가 흐르다가, 새가 되고 꽃이 되고 물이 되어 노닐다 보면 어느새 나는 어디 온데간데없이 되고 만다네, 내가 나를 잊는데(장자는 '제물론齊物論'에서 이를 오상아吾喪我라 하데) 불과 한나절도 안 걸리네, 이렇게 좋은 데가 산인데, 지금 나는 그 산의 품에 안겨 있는 것이네!

 

이렇게 나에게는 산의 힘, 산의 감동이 크다네. 내가 산을 찾거나(나는 산이 부른다고 말하려 하네, 사실 산이 부르는 소리를 자주 듣고 달려올 때가 많았으니까...) 산을 오를 때면 나의 영혼은 청옥의 하늘처럼 맑아지고 동해의 바다처럼 찰랑거린다네. 이렇게 마음을 추스르며 마음에 소란한 상념과 번잡한 훤화 다 씻어 물에 흘려보내면 드디어 멀리 천불동계곡 물소리 가슴에 울리고 창공을 흐르는 구름 그림자도 눈앞에 어른거리는 것을, 이 경계 없는 산의 지향이 얼마나 평안하리오, 만학천봉萬壑千峯을 다 가슴에 안은 것 같은 마음의 부요富饒, 더욱이 아늑한 설악의 가을산, 철철이 꽃 피고 지는 하늘이 내린 설악의 영토! 산국과 투구꽃과 숨어 핀 금강초롱꽃과 오이풀꽃, 물소리와 무념무상의 길과 새의 노래를 함께 소요유逍遙遊할 수 있으니, 이 세상 그 무엇인들 이보다 더 달콤한 욕망(?)이 될 수 있으랴. 너무나 많은 것을 누리며 살고 있다는 감당할 수 없는 감사의 눈물, 나는 결코 이 세상 그 어디에도 한눈팔 겨를이 없는 몸이 되고 만다네.

 

틈나면 골방이나 동네 도서관 구석에서 책을 보고 글을 쓰고 다시 민달팽이 걸음으로 산을 건너고, 혼자만의 고독한 아픔을 이겨내며 여행을 즐긴다는 것은 결코 쉽지않은 일일 것이지만, 이 세상 사람과 어울려 누리는 흥이 내가 좋아서 혼자 누리는 삶보다 더 즐겁고 맘 편한 수 있으랴, 이 세상에서 누리는 그 어떤 즐거움이 산에서 들에서 섬에서 자연과 벗 삼아 누리는 유유자적, 안분지족한 삶보다 더 상승하는 기쁨이 되랴, 모든 것은 일순간이요, 일순간의 세상 쾌락과 희열은 분명 연기처럼 다 사라지고 말 텐데, 다 지나가고 다 사라지고 나면 아픔과 후회와 두려움과 근심이 찾아와 영혼의 평안을 앗아가고 마는 것 아니리오, 그리할진데 순실한 자연과 벗하고 책과 글 쓰는 일과 벗하며 누리는 그 깊고 잔잔한 맛을 무엇과 견줄 데 있으리오.

산의 길 자연의 길이 더불어 인간의 길이거늘, 갈수록 인간은 자연의 길을 떠나 인간의 길만 가려하고 있으니... , 어처구니없는 비극이 아닐 수 없네, 자연 앞에서, 산과 물과 강과 바다 앞에서 하늘 아래서 인간처럼 오만하고 어리석고, 옹졸하게 쩨쩨하게 목숨 하나 지켜내려고 발버둥 치는 미물이 어디 또 있을까. 

인간은 도덕의 길, 자연의 길, 정의의 길, 인정의 길, 화평의 길 다 버리고 오직 자신의 탐욕과 유익을 추구하는 길만 고집하고 있으니, 정말 이 지구상에 인간이란 피조물보다 더 미천한 오합지졸, 천덕꾸러기는 없을 것이네. 아무리 인간은 학식이 많고 지위가 있고 권력이 있고 부자이고 자랑거리가 많아도 우주적 존재로서의 인간은 가장 치명적인 위험을 초래할 아주 극심한 배타적 존재일 것임은 틀림없을 것이네. 이런 인간이, 기껏 오래 살아봐야 백 년도 못 사는 인간이 그나마 조금이라도 고상해지는 길은 신앙의 길과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길, 예술과 철학적인 근원을 추구하는 길, 자연과 동화된 삶을 사는 무욕의 길, 자연의 길에서 자연과 호흡하며 인간 개체의 정체성을 회복하는 길일 터인데, 이도 거부하고 세상 탐욕과 구름처럼 정처 없는 세상 풍조의 수렁으로 점점 빠져들고 있으니 (나는 그 정도가 더 심각한 상태라서 이루 말할 수 없지만, 아니다, 나는 나의 이런 한계와 취약점을 간파하였기에 퇴직 이후 철저히 나를 회복하는 길을 자연과 조화로이 벗하는 시간 속에서 누려보려 하는 것이다.) 안타까운 마음 금할 길이 없다네... (사실 많은 사람 걱정이 아니라, 오직 그대를 생각하는 마음이 깊은 탓에...)

 

가만 보면 사람들은 삶과 죽음을 균형 있게 생각하며 생을 누리는 게 아니라, 오직 삶만 생각하고 죽음을 외면하거나 잊고 사는 비틀거리는 바보의 길을 가는 사람이 많은 것 같데. 죽음을 외면한, 죽음을 거부한, 죽음을 생각하고 싶지 않은, 죽음을 전혀 모르거나 준비하려 하지 않는 바보들이 많은 것 같아서 늘 씁쓸하다네, 이제 죽음을 살아야 하네, 지금까지 악착같이 삶만 살아왔으니 남은 길은 죽음을 살아야 하네, 죽음을 사는 인간이 되지 않으면 안 되네, 죽음을 모르면 삶을 제대로 잘 살 수 없네, 얼마 남지도 않았는데... 죽음에 대한 사유가 없는 사람은 삶을 제대로 모르네, 삶을 잘 살기 위해서는 죽음을 잘 알아야 하네, 죽음을 사는 사람만이 삶을 고귀하고 거룩하게 살 수 있다고 믿는다네, 죽음을 아는 일은 나의 삶을 더 잘 살기 위함 아니겠는가.

 

삶과 죽음의 양 바퀴가 균형을 이루지 못하면 비틀거리는 인생을 살 수밖에 없는 것 같아, 자신의 존재를 모르는 삶, 자신의 정체성, 자아의 존재 의미를 모르는 반지성의 삶을 사는 것이 얼마나 맹목적인 길이겠는가. 그래서 죽음을 제대로 알고 가는 길이 삶을 더욱 잘 사는 길이 되는 것이네, 인간에 대해, 삶과 죽음에 대한 철학적 사유가 필요한 까닭이 여기 있지 않을까, 우리가 무엇을 알아야 하는 이유는 슬픈 존재인 유한한 인간이 허락받은 인생을 잘살기 위함이네, (인간이 잘 사는 것은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는 것만을 결코 의미하지 않음을 자네가 나보다 더 잘 알지 않은가.) 무엇보다 행복의 좁은 문으로 행복의 좁은 길로 가기 위함이지, 나의 생을 사랑하는 가장 확실한 실천이 아니겠는가, 행복의 좁은 길로 나아가는 길, 우리는 철학적이고 근원적인 탐색을 하며 살아야 하네, 왜 사는가, 나란 누구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한 길인가, 등 보다 실존적인 질문에 대한 나름 해답을 확고하게 세우려 노력해야 하는 것이네, 돈 버는 일보다 더 값진 것이니까.

 

울산바위을 보면 염결 정결 순결 청결 고결 청빈 무위 무소유 함묵, 이런 말이 나의 가슴에 들어와 다시 봉우리가 된다
울산바위을 보면 염결 정결 순결 청결 고결 청빈 무위 무소유 함묵, 이런 말이 나의 가슴에 들어와 다시 봉우리가 된다

올해만 나는 일곱 번을 나그네 길손의 마음이 되어 설악을 걸었다네. 올해 만난 설악산은 나에게 감동이요 가장 투명한 존재의 근원을 탐색하는 길로 나를 늘 인도해 주었다네.. 산은 최고의 경전이거든, 산처럼 심오한 것을 무궁무진 담고 있는 지혜와 철학의 세계는 그 어디에도 없다네, 산처럼 겸손하고 맑고 순결한 실제는 없네, 산은 태초의 시간이요 태초의 고향이네, 산은 우리가 읽고 배우고 머물러야 할 영혼의 쉼터인 것이네, 우리가 영원히 배우는 존재로 살다가 이 땅을 떠나야 한다면 그 배움의 전당은 산이 되어야 하네, 산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산의 가르침에 묵묵히 순응하는 조화의 삶을 살아야 하네, 산의 단순함과 자연스러움 산의 무위와 무욕을 배우고 익히며 살아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네, 이 자연으로 지향하는 길만이 나 자신을 사랑하는 길이요, 나 자신을 행복의 문으로 인도하는 길이라 믿는다네.

 

조금 오래 머물다 돌아가려 했네만 지방 방문하는 날에 맞춰서 귀경할까 하네, 오랜 여행을 하고 혼자서 긴 밤을 보내는 것도 누구나 쉽게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그대는 알아야 할 것이네, 그런 점에서 나는 매일매일 놀라운 기적을 살고 있다고 할 수 있네, 혼자서 산을 오르고 혼자서 밤을 새우고 혼자서 하루를 거뜬히 보내는 일은 아주 특별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라 믿는다네, 완악한 나도 이렇게 달라질 수 있구나, 깜짝깜짝 나 자신한테 놀랄 때가 있으니, 마음 하나가, 생각 하나가, 말이나 태도 하나가, 나를 지켜주는 벼리로구나, 나의 생각이 마음이 나를 이렇게 변화시킬 줄을 어떻게 전에 알았겠는가, 인생을 이끄는 힘은 마음이네, 생각이네, 말이요 언어네. 인간은 끊임없이 변할 수 있는 열린 가능성의 세계네, 그래서 나는 모든 관념과 허무맹랑한 지식과 과학을 다 버리고 오직 자연, 순결한 자연의 길에 순종하려는 것이네, 내가 그대에게 장자를 읽으라, 니체를 읽으라, 하는 이유는 자네가 장자와 니체를 읽다 보면 알 것이기에 더 이상 여기서 언급을 하지 않으려 하지만, 오직 장자와 니체는 나의 영원한 화두요 담론이네, 그리고 잠언일세.

인생은 우연히 이루어지는 것 하나 없네, 나의 길이 누군가에게 다시 길이 되기 위해서는 나의 산 체험이 쌓아 올린 시간의 누적과 기억(기록), 직접 어떤 길을 가본 경험 위에서라야 가능할 것인데...

산에 관한 글을 쓰기 위해서는 산을 알아야 하고 그 산을 알기 위해서는 산과 자주 만나야 하고, 그 산을 오래 바라봐야 하는 것 같네, 산의 숨결을 들어야 하네, 산의 말을 듣는 열린 가슴을 가져야 하네, 소인의 앎을 버려야 한다는 말이네, 대인의 큰 앎을 큰 가슴을 소유해야 하네, 다 비우는 것이데... 긴 기다림과 긴 시간을 산에서 보내야 하는 길이데, 설악에 머문 시간이 얼마나 되었을까, 이제야 설악의 길이 아주 조금씩, 아주 희미하게 그 끄트머리 하나가 보이기 시작하데.

 

그동안 혼자서 산을 가고, 혼자서 밤을 보내고, 혼자서 여행하는 길, 책을 읽고 공부하며 글을 쓰는 길, 얼마나 어렵고 힘든 길이었는데, (나의 마음이 그대의 관용과 인내 앞에 많이 풀어진 모양이야. 혼자서 건너온 길과 산과 강과 바다와 섬에서 나의 외로움의 수심도 아주 깊어졌을 것이야, 그런 탓에 말문이 열린 수도꼭지처럼 술술 나오고 만 것이네. 끝까지 조금만 더 참고 들어주시게, 적선하는 것이라 생각하면 맘이 편안할 것이니까.) 그러나 그 길에서 노니는 법을 조금씩 터득해가고 있다네, (?)을 버는 길만이 생의 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속에서 나는 외람되이 낯선 길을 가고 있는 셈인데, 그러나 장자 선생이 말한 것처럼 순수하게 사는 길은 노니는 것이라고, 자연을 닮은 어린아이로 사는 길이라고, 확신하는 데까지 왔다네.(지금 자네와 나의 계절이 어디쯤인지는 알아야 하니까, 이제는 철들 때이니까.) 결국 이 길이 즐거운 길이니까, 스스로 가고 있겠지, 하나님이 나를 지켜주시니까, 그분이 나를 이 길로 인도해 주시니까, 나의 힘이 되어주시니까, 나는 그 누구보다도 연약하고 무지하고 가난하고 아주 사소한 초개 같은 피조물일 뿐이니까.

 

설악동의 밤공기가 아주 차네, 멀리 비룡폭포와 토왕성폭포와 울산바위가 내일 아침을 생각하여 편히 밤을 잘 보내라고 하는 소리가 막 들려오네, 오늘도 나는 이 지상에서 낙원을 만나야 한다고, 꼭 천국을 살아야 한다고 기도하며 다짐하였는데, 나는 결국 오늘 그 낙원을 보았네, 그 낙원을 기적처럼 살 수 있었네. 천국과 낙원은 이 땅 가운데서도 맘만 잘 지키면 누릴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 점점 되어가고 있는 것이네, 이 땅 가운데서도 나는 천국을 살 수 있다는 믿음이 나의 일상을 크게 변화시키고 있다네, 이 놀라운 변화는 하나님과 산과 시와 글 쓰는 일이 추동한 것이네, 무엇보다 매사에 긍정의 사람이 되어가고 있으니, 이 믿음의 힘이 지금도 나를 견인하고 있지 않을까, 나를 결코 혼자로 내버려 두지 않는다는 강하고 깊은 신뢰. 이 믿음이 나를 견인해 온 것이네, 어디든 나 혼자 갈 수 있는 힘의 근원이었던 것이었네, 그러고 보니 작은 답을 하나 얻은 셈인데, 인생의 행복의 문은 돈과 명예와 아파트와 권력과 자식과 학문을 소유하여 도달할 수 있는 세계가 결코 아니라는 것이네.

 

결국 마음이네, 믿음이네, 긍정의 생각이고 긍정의 말이네, 이 무형의 말과 생각과 믿음과 마음이 나의 인생을 행복의 길로 인도한다는 것을, 그 길은 자연의 길과 신앙의 길과 예술의 길에서라야 만날 수 있다는 것을 길을 걷고 강을 건너고 바다를 항해하여 섬으로 가는 길에서 극명하게 보고 읽을 수 있었다네, 나라는 존재의 명징한 근원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 먼저 필요한 것이네, 그 인식으로부터 나의 삶과 지향은 결정되었으니, 그대의 오늘이 가을물처럼 맑은 삶이 되기를 기도하며 깊은 설악의 품에 안기려 하네.

 

(20230216, 솔물새꽃의 ’설악동일기‘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