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토성산積土成山의 산에 관한 명상 - 자아와 세계는 하나, 물아일체의 山과 나, 나와 山! 산을 보고 느끼려면 직관(直觀)이 있어야 한다. 산을 보는 경험 이전의 선험적인 직관의 눈이 열려야 한다. 반복적인 경험이나 추리에 의하지 않고 산을 즉각적으로 느끼고 깨닫는 인식의 안목이 열려야 한다.
산을 보고 느끼려면 직관(直觀)이 있어야 한다. 산을 보는 경험 이전의 선험적인 직관의 눈이 열려야 한다. 반복적인 경험이나 추리에 의하지 않고 산을 즉각적으로 느끼고 깨닫는 인식의 안목이 열려야 한다. 이를 위해 적당한 ‘거리’(정서적 거리)를 두고 산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산과의 적당한 거리를 두고 바라봐야 산이 잘 보인다. 한 대상을 바라보는 데는 알맞은 거리를 확보해야 제대로 볼 수 있다.
모든 분야가 다 그렇지만 직관은 일조일석(一朝一夕)에 오는 것이 아니다. 지속적으로 반복하여 보고 또 보고, 읽고 또 읽고, 생각하고 또 생각한 다음에라야 직관은 열린다. 산의 경우도 산과 자주 만나 산과 친해져야 산을 읽을 수 있고 산을 볼 수 있다. 눈에 보이는 산의 외양뿐만 아니라 산의 내밀한 울림까지도 즉각적으로 느끼는 직관이 작동한다. 그러기 때문에 산과 친밀한 조화를 지속하려면 산을 멀리서 보고 읽는 일이 오직 정상을 향하여 직진하는 일보다 선행되어야 하는 까닭이다. 한 사람을 만나 알아가고 이해하는 일이나 책을 읽고 이해하는 일도 산을 보고 읽는 일이나 거의 한결같은 길이다.
산을 하나의 인격체로 대하거나 우주적인 존재의 대상으로 인식하는 공평한 사유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 산을 존중하고 산을 이해하려는 열린 마음이 선행할 때 나의 마음은 산을 향해 따뜻한 지향의 눈을 갖게 될 것이다. 산의 마음과 나의 마음이 서로 통하여 합일을 이룰 때, 산과 나의 경계가 사라지고 흔연히 하나가 되었을 때, 비로소 산이 보이고 산이 읽어진다. 산을 보지 못하면, 산을 읽지 못하면 산을 알 수 없다. 산을 알지 못한 사람이라면 산의 수많은 소리와 빛과 형상을 도저히 읽을 수 없다. 산속에서 소요유의 낙을 누릴 수 없다. 산을 즐길 수 없다. 산의 큰 담론, 산의 큰 뜻 큰 가슴을 도저히 읽을 수 없다. 적토성산積土成山, 한 톨의 흙이 모여 태산을 이룬 산의 태고성과 산의 함의를 간과하고 말 것이다.
산은 오르는 곳이 결코 아니다. 산은 정상, 산꼭대기 표비석 앞에서 정상 정복을 과시하기 위해(?) 오르는 산이 결코 아니다. 이런 점에서 산을 오르는 일은 인생이 추구하는 삶의 지향성에 맞닿아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 산은 정상 정복이나 체력단련이나 건강증진을 위한 특정 목적 실현을 시험하는 곳이 결코 아니다. 진정한 산행은 길 위에서 누리는 즐거움이다.
산행은 길이 길로 나아가는 끊임없는 과정이다. 산길 끝에 도달하는 정상 정복만이 산행의 의미가 될 수 없다. 인생의 행복이 길 끝에 있는 게 아니라, 가치 있는 그 무엇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길 위에 있다는 것을 우리가 공감하고 있다면 산행의 의미와 보람을 새삼 공감하게 될 것이다. 산길을 거닐면서 만나는 천태만상의 형상과 산의 숨결, 계곡을 흐르는 맑은 물소리와 명경지수에 비친 바위와 벼랑 위의 금강송, 온갖 새들의 노래, 철철이 피고 지는 각양각색의 야생화, 비 갠 후의 청신한 햇살, 온 산을 휘덮고 있던 먹장구름이 산등성이를 넘어 하늘로 떠밀려 오를 때 언뜻언뜻 드러나기 시작한 기암영봉의 장엄한 형상을 안전에서 마주 볼 때 얼마나 산은 깊고 그윽한 가슴을 품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지를 비로소 알 수 있다.
산은 사람과 마찬가지로 만날 때마다 더 깊고 더 넓은 가슴으로 나를 기다리고 있음을 금방 알 수 있다. 매번 산을 오를 때보다 보이지 않았던 나무와 야생화가 마중 나와 나를 반긴다. 점점 눈에 익은 길들이 친밀감을 더해준다. 물소리만 들어도 산속의 거리를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지리산이든 설악산이든 서울 속 북한산이든 갈 때마다 구태여 낯선 새 길을 가려고 하지 않는다. 한 길만을 고집한다. 나의 감관기관이 저절로 열리도록 친숙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때면 이정표를 보지 않고도 거리를 분별할 수 있는 감각이 열리고 길의 흐름과 길의 갈림길을 분별할 수 있는 짐작이 저절로 생겨난다. 어디쯤 가면 손 바가지로 물을 받아 마실 수 있고 또 어디쯤 가면 물소리 좋은 반석 위에 앉아 쉴 수 있고 또 어디쯤 가면 확 트인 일망무애의 조망 좋은 곳을 감각으로 짐작할 수 있어 얼마나 산행이 여유 있고 평안한 지 이루 형언할 수 없다.
어찌 보면 산은 오르는 곳이 아니라 산은 길을 걷는 곳이다. 산과 노니는 곳이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길 위에서 누리는 즐거움을 향유하는 길이 산행이다.
그래서 산행은 앞만 보고 가는 길이 아니라 지나온 길을 돌아보며 호흡을 고르고 쉼 누리며 쉬엄쉬엄 걸어가는 민달팽이의 길이다. 앞만 보고 오를 때 보지 못한 길들과 산의 풍경들은 뒤돌아볼 때면 더욱 뚜렷이 숨은 곳곳을 더 잘 보여준다. 산의 아름다움과 산의 너그럽고 인자한 포용의 마음은 가는 길마다 군데군데 봉곳이 솟아오른 곳에 앉아 뒤돌아보고 사방을 두리번거릴 때 더 잘 보인다. 어찌 산행의 목표를 정상 정복에 다 두고 쏜살같이 산꼭대기에 올라 정상정복을 확증하는 인증샷(?)을 남기고 밋밋하게 돌아오는 길이라 할 수 있으랴. 어찌 산행의 과정에서 맛보는 다양한 묘미를 생략한 채 죽자 사자 길 끝만 바라보고 한 눈 한번 팔지 않고 앞으로만 나아가는 길이라 할 수 있으랴. 어찌 인생길을 인생길 끝 어딘가에 있을 행복과 성공(?)만을 향하여 달려갈 수 있으랴. 산행이나 인생이나 행복은 어디 끝에 있는 게 결코 아니다. 행복과 보람은 그 어디를 향하여 나아가는 길 위의 과정이다. 길의 도상에 점점이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리라.
세상 거의 모든 일은 무엇이나 오랜 시간의 경과와 반복하는 숙련의 과정이 있어야 그 비의祕意와 은밀한 원리를 체득할 수 있다. 묵언수행默言修行하는 견인주의자堅忍主義者의 도덕과 견성見性까지도 산을 통하고 산을 오르는 길에서라면 깨달을 수 있다. 이때 산은 드디어 완성된 인격의 행위를 수행하는 나와 평등한 존재가 된다. 이것이 바로 산을 보고 느끼는 직관直觀이다. 직관의 눈이 열릴 때가 산이 드디어 가슴을 열어 나를 안아줄 때이다. 산의 크고 넓고 깊은 한없이 온정적인 산의 품에 안기는 평안과 쉼이 내 안에 가득 차오를 때이다. 산과 내가, 나와 산이 하나가 되는 혼융의 경지, 내가 산이 되고 산이 내가 되어 서로를 구분할 수 없는 호접몽胡蝶夢의 정점, 이른바 신명의 극치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중국 전국시대 장자(莊子)가 꿈에 나비가 되어 즐겁게 놀다가 깬 뒤에 자기가 나비의 꿈을 꾸었는지 나비가 자기의 꿈을 꾸고 있는 것인지 알기 어렵다고 한 고사처럼 자아(自我)와 세계(=산)가 본디 하나라는 물아일체의 정수에 도달할 수 있다.
이때라야 비로소 산은 마음을 열어준다. 산의 숨은 얼굴이 보이기 시작한다. 산의 숨결이 들리고 산의 미소가 보인다. 산을 흐르는 역동하는 기운이 박동하는 것을 느낄 수 있고 산을 보지 않고도 멀리서도 산의 형상과 산 위를 떠 흐르는 구름과 바람의 그림자와 물소리까지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그러므로 산의 아름다움과 산이 나에게 베풀어주는 무한한 감동과 영일(迎日)은 온전히 나의 마음이 산의 마음과 하나가 되었을 때라야 오는 것이다. 가장 순결하고 순수한 마음의 정점, 세상 소욕(所慾) 다 사라지고 마음에 원하는 것들 털끝 한 올 만한 욕망도 다 비워낸 지경에 이르렀을 때 산을 온전히 내 안에 들어와 산이 된다. 내 안에 산이 들어와 좌정하고 있음을 가슴 가득 느낄 수 있다.
우리의 마음이 세상 소욕(所慾)으로 가득하여 마음 어느 한 모퉁이 빈구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데 어떻게 산이 내 안에 머물 수 있겠는가. 산이 어떻게 내 안에 다가와 나와 놀아주겠는가. 그래서 산이 부르는 소리를 듣는 산을 좋아하는 사람은 산에 오르기 전에 내 안에 여백을 만드는 일이 우선이어야 한다. 흉중(胸中)의 진탁(塵濁)을 말끔히 씻는 일이면야 무엇을 더 바라랴.
우리의 정신을 단순하고 순결하게 결집시키는 벼리와 근골(筋骨)은 신앙의 세계와 예술의 세계와 자연(산)의 세계 밖에서는 도저히 찾아낼 수가 없다. 신앙을 통한 구원과 자유, 예술의 아름다움(=미美)을 통한 순결한 감성의 출로가 사라진다면 이 세계는 황무한 사막으로 변하고 말 것이다. 그리고 산은 무위의 절정이요, 산은 자연 품성(稟性)이 완성된 고매한 도덕의 현현(顯現)이라 할 수 있다. 어찌 세속의 사슬에 결박당하여 하늘이 허락한 수양의 도량(道場)인 아름다운 산을 모른 채 일생을 남루하게 허송하랴.
(솔물새꽃의 설악동일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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