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석봉 가는, 어느 황톳빛 늦은 가을길이었을 거야, 귀에 익은 정갈한 물소리 눈에 익은 그윽한 숲길 세상 그 어디서 이런 아늑한 품에 안겨보았으랴, 무엇이 이보다 더 반가우랴 반가우랴, 이리도 맑은 물빛 인정을 어디서 누려보랴 어디서 누려보랴,
심중에 남아 있던 상념이 다 사라지고, 오만 생각과 말과 근심도 다 스러져버린 텅 빈 가을 하늘 노을이었을 거야, 무심히 들어서고 있었을 거야, 산으로... 백무동으로 노란 산국의 반가운 시선을 따라 한신계곡 물의 가슴으로 들어서고 있었을 거야, 그렇게 나의 지리산의 가을은 나를 부르고 있었을 거야. 나를 부를 때면 늘 그랬듯이, 물빛 물의 노래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귀에 익은 정갈한 물소리 눈에 익은 그윽한 숲길 세상 그 어디서 이런 아늑한 품에 안겨보았으랴, 무엇이 이보다 더 반가우랴 반가우랴, 이리도 맑은 물빛 인정을 어디서 누려보랴 어디서 누려보랴,
가내소폭포의 짙푸른 가슴의 멍은 그 언제나 풀릴까, 나를 반기는 품이 깊은 갈참나무 함박나무 함박웃음, 태연자약, 세월이 두렵지 않은 초목들, 안으로 안으로 깊어가는 무위의 큰 뜻 큰 포부를 언제나 나는 읽을 수 있으랴, 하얀 기암절애의 고독한 눈빛과 너럭바위의 명경에 몇 번의 낯익은 인사를 서두르면 어느새 지나와버린 한신계곡, 가을이 몹시도 애석한 노란 산국의 눈빛들을 뒤로하며, 끝까지 나의 길을 지켜준 계곡의 물줄기 물의 노래들 산의 이야기들은 귓전을 떠나지 않는데, 오층폭포 앞에 앉아 세석평원 하늘길과 연하선경 아늑한 길을 그리며, 제석봉 황톳빛 가을 고원을 상상하며, 긴 한신계곡 벗들과 아쉬운 작별을 하려 할 때, 손 바가지로 연신 떠 마신 지리산 깊은 심장에서 분출하는 천예의 생수! 뱃속이 출렁거리는 산의 숨결 산의 기운! 그 힘으로 다시 걸으려 할 때, 지리산의 그윽한 가슴을 타고 흐르는 생수의 달콤함은 도저히 잊을 수 없는 감동이었지, 영혼의 기갈을 적셔주고 마음의 부유하는 진애(塵埃)를 일순간 다 씻어내버리고 말았지,
가파른 8부 능선의 고비, 늘 고난의 길은 행복의 턱밑 문전에 닿아 있는 길, 세석평원의 확 트인 하늘이 반긴다. 세석의 꿀맛 샘물을 마시면 머리 위 하늘길이 훤히 열리고 내 발아래 있는 온 세상이 좁쌀처럼 미미하게 보인다. 드넓은 산하 드높은 지리산의 영봉들, 만학천봉을 거느린 지리산의 끝이 없는 품, 가슴, 사랑, 관용, 인자와 도덕이 내 안에 온전히 다 들어온다. 산을 올라 호연지기를 익힌다는 것이 이쯤에서 이루어지는 산 체험이 아니랴,
세석을 나서 촛대봉 연하봉 삼신봉 가는 길을 그리며, 머얼리 천왕봉을 바라보며 다시 산길을 재촉하는 길이 열리고 다시 기다리는 길, 산의 길이 아니면 그 어디서 한 번이라도 걸어보랴, 촛대봉에 올라 지난 몇 해 전 일출의 광경을 상상하며, 새삼 인생은 누리는 자만이 즐길 수 있고 누리는 자만이 천하의 풍요로운 축복을 소유할 수 있음을 실감한다네, 언제 다시 촛대봉 일출의 장관을 다시 누려보랴, 두 번 다시 오지 않는 길, 항상 우리는 두 번 다시 오지 않는 아스라한 길을 가고 있는 것이 아니랴,
촛대봉을 건너니 연하선경이 열리는 길, 아늑한 연하의 품에 살짝이 안겨 지난봄 지리산 뻐꾹새 울고 울 때를 추억하며, 세월의 무심함 앞에 눈물 젖은 그리움을 두어 줌 노고단 반야봉 달궁 너머로 날려 보내니,, 서북능선이 나의 마음을 엿보았을까, 구름을 헤치고 나의 안전에 다가와 나를 반긴다. 산보다 따스한 인정 너그러운 가슴을 품은 생명이 있으랴, 삼신봉 손 흔들어 안부를 전하니 장터목 천왕봉 가는 길목, 제석봉 황갈색 가을을 만나러 가는 길이 비로소 나를 반기며 부르는 소리,
서둘러 당도한 제석봉의 만추 서정, 벌써 가을 무서리에 초췌해진 용담꽃 눈망울과 잎사귀, 오이풀꽃과 산국의 가을이 들려주는 지나온 봄과 여름의 이야기 무성하다. 가을 산길은 산의 시간이 유난히 선명이 흐르지, 또한 산에서는 한 생애를 산 계절의 역사와 길이 이야기처럼 이어진다네,
길은 무엇인가를 이루기 위해 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길은 어디에 도달하기 위해 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저 살아있기 위해 가는 길이라는 것을 제석봉 황톳빛 가을산은 온몸의 독백으로 보여주네, 가을산이 보여주는 무욕의 겸손, 가을산이 보여주는 순결한 생애의 길, 인생은 산꼭대기를 오르는 것이 아니라 끝없는 길을, 길이 없는 끝없는 광야의 길을 지나는 것이라고, 제석봉 가는 가을산은 나에게 일러주네, 한사코 산은 오르지 말고 산길을 걸으라고, 산과 친구가 되어보라고 산의 능선을 내려가는 길을 배우라고, 인생길을 가는 법을 배우라고 길은 끝이 없다고 길 끝에 행복이 있지 않다고 나를 설득하데,
종일 오래도록 산의 길을 걷다 보면 한 모금의 생수와 허기진 기갈을 채워줄 양식이 조금 필요할 뿐, 많은 것이 결코 필요하지 않음을 절실히 깨닫네, 긴 산길을 온전히 통과하여 안전한 하산을 바라는 것 외에는 마음에 모든 소욕은 다 사라지고 말지, 이게 무욕 무소유 무심의 텅 빈 마음일까, 그래도 큰 산을 가슴에 듬뿍 품었으니,
지난 몇 해 전 이맘때 만나고 온 가을 지리산이 종일 나를 부른다. 지나온 길마다 추억은 흐르고, 항상 가슴은 흐르지 않는 세월이 남아 서성이는 포구의 길목 같은데, 나는 가을이면 그 아득한 기억이 잔잔히 흐르는 가을 길을 강을 걷듯이 다시 걷는다.
제석봉 가는, 어느 황톳빛 늦은 가을길이었을 거야, 그 길이 나를 늘 반긴다, 나를 늘 기다린다, 나를 오라 부른다.
(20230210, 솔물새꽃의 '지리산일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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