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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

도봉에 올라, 자운봉과 오봉을 보다!

by 솔물새꽃 2023. 6.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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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봉을 오르니 도봉은 없고 자운봉과 신선대와 선인봉과 만장봉만 보인다!
도봉을 오르니 도봉은 없고 자운봉과 신선대와 선인봉과 만장봉만 보인다!

도봉道峯에 올라, 자운봉紫雲蜂과 오봉五峰을 보다!

마음이 부르는 대로 어디든 갈 수 있는 산을 두고 사는 일은 큰 축복이다. 눈 뜨면 산의 이마에 반짝이는 아침 햇살을 맞이하는 일은 더 놀라운 은혜이다. 걸어서든 지하철이나 버스로든 산에 다가가 산의 품에 안기는 삶은 얼마나 큰 행복인가, 한국의 산이 부러워 먼 북유럽 아이슬란드에서 날아온 눈이 푸른 젊은 청년의 말처럼 우리는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천국을 살고 있는지 모른다. 그 친구는 어디든 몇 시간이면 닿을 수 있는 멋진 산을 사방에 두르고 사는 서울 사람은 천국을 누리고 있다고 부러워하였다. 눈 뜨면 바라볼 수 있는 산을 눈앞에 두고 사는 사람은 얼마나 큰 축복을 누리는 자인가, 라고 반문하였다.
 
산이 부르는 소리 들린다. 해사한 산의 그림자가 눈앞에 어른거린다. 반야봉 능선을 넘어가는 해설픈 햇무리의 길이 노을에 잠기는 것도 보인다. 천불동계곡의 희고 맑은 물소리가 아슴아슴 들려오는 것도 느낀다, 제석봉 지나 천왕봉 가는 길 고사목의 시간은 얼마나 더 깊어갈까, 세석고원의 연분홍 수줍은 철쭉은 올해도 얼마나 서러울까, 연하선경 넘나드는 봄바람은 진즉 먼 길 떠났을까, 장터목에서 아들이랑 바라본 노고단 하늘 낮달의 길은 아직도 흐르고 있을까, 공룡능선 민달팽이는 여전히 초록바다를 느림느림 건너고 있을까, 엊그제 비 온 바로 다음 날, 백록담 가슴에 고인 진주빛 눈망울은 얼마나 푸를까, 얼마나 또 깊을까,
 
산이 가까이 내게 오는 소리 이렇게 속삭인다. 산이 나보다 나를 먼저 알고 내 안에 들어와 있음이다. 세상이나 사람이 다소 쓸쓸하고 마냥 서러울 때, 허허한 가슴에 축축한 대지의 감촉이 그리울 때, 물소리 새소리 꽃의 미소 솔향기가 오감의 문전을 서성일 때면 나는 늘 산으로 간다. 나는 산의 품에 안긴다. 산과 나는 금세 하나가 된다.

 

산이 나보다 나를 먼저 알고 내 안에 들어와 있음이다.
산이 나보다 나를 먼저 알고 내 안에 들어와 있음이다!

누구에게나 편견과 청탁淸濁(좋고 나쁨)이 없는 산, 언제고 가슴을 열고 나를 기다려주는 산,

공평하게 평등하게 맞아주는 무등無等(등급을 나누지 않는)의 산,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 산, 우리에게 안식과 평강과 영감을 채워주는 산, 산이 부르는 소리 내 안에 모락모락 피어나면 지리산과 설악과 한라가 섬처럼 나의 바다에 솟아오른다. 오감으로 촉감하는 산의 숨결 산의 길이 산의 빛깔이 내 안에 자욱하다. 바로 이때다. 산이 내가 되고 내가 산이 될 때인 것이다. 산과 내가 해조諧調의 합일을 이룰 수 있는 최적의 때인 것이다. 나는 이때를 기다려 산문에 들어선다.
 
서울 도성을 감싸고 있는 산의 능선을 보라, 눈 뜨면 바라보는 산이라서 흔하디흔한 산의 얼굴이라고 그 반가움이 덜할 수 있을 것이리라, 그리할지라도 산의 품에 안긴 도성을, 산의 가슴에 깃들어 사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분명 서울과 서울 시민은 산의 자비와 은택을 누리며 기적의 생을 사는 사람들임이 틀림없다.
 

좌로 밋밋한 바위 산 사패산에서 시작하여 도봉 신선대 위에 서서 지나온 도봉의 능선을 돌아본다! 돌아볼 때 더 잘 보이는 길!
좌로 밋밋한 바위 산 사패산에서 시작하여 도봉 신선대 위에 서서 지나온 도봉의 능선을 돌아본다! 돌아볼 때 더 잘 보이는 길!

오늘에야 도봉을 오른다. 도봉이 나를 오라 한다.

도봉이 부르지 않은 적이 있었으랴만 오랫동안 기다리며 미루어오기만 한 도봉을 드디어 가려고 한다. 북한산을 오를 때마다, 수락산과 불암산을 넘을 때마다 손 내밀어 악수만 하고 눈빛만 보내며 돌아왔던 도봉! 어찌 눈에 보이는 것이 산의 전부가 되랴, 산이나 사람이나 이 세계는 눈에 보이는 것보다 더 많은 신비한 형상을 감추고 있을 것이 틀림없다. 가까이 다가가 오래오래 머물러 있지 않으면 도저히 알 수 없는 천의 얼굴을 감추고 있는 것이 산과 사람들과 이 세계일 것이다. 단 한 번의 보는 일과 만남으로 다 안다고 함부로 떠들 일 아니다. 그 도봉의 숨은 얼굴과 숨결과 빛깔을 만나러 나는 오늘 도봉을 간다. 몇 번을 더 만나야 도봉을 말할 수 있을까,
 
전철 의정부역에서 내려 사패산 안골계곡까지 버스로 이동하니 오정午正까지 절반이 다 지났다. 안골계곡 사패산 가는 길은 정말 포근하다. 도봉산 자운봉으로 가는 길에 이런 아늑한 숲길을 걸어보는 것은 큰 별미다. 안개 자욱한 사패산 가는 길은 기도의 시간이다. 나를 되돌아보며 나를 비우고 심신의 진부한 부유물을 씻는 길이다. 산과 세상의 변화무상을 믿는 나는 비가 온다고 눈바람이 친다고 해가 비친다고 산을 탓한 적이 거의 없다. 산에서는 비가 와도 비와 안개와 바람이 불어도 눈보라가 몰아쳐도 산은 언제고 놀라운 보람으로 우리의 발걸음을 헛되이 돌려보내는 법이 없는 것을 익히 아는 까닭이다. 오늘도 오리무중의 안갯길을 걸어 사패산을 지나 도봉을 만나러 간다. 도봉은 멋진 도봉의 진면목을 보여줄 것을 틀림없이 믿고 길을 나선다.
 

멀리서 보아야 더 잘 보일 때도 가까이서 보아야 더 잘 보일 때도 있다. 도봉에 올라 멀리서 바라본 사패산은 넘 아름다웠다!
멀리서 보아야 더 잘 보일 때도 가까이서 보아야 더 잘 보일 때도 있다. 도봉에 올라 멀리서 바라본 사패산은 넘 아름다웠다!

 
사패산 정상(552m) 너럭바위(마당바위)에 올라 하늘과 사방을 향해 큰 포효의 함성을 질러본다. 시야가 좋았으면 반가운 도봉을 바로 눈앞에서 불러 볼 수도 있었으련만, 아쉬움은 늘 갈망을 부르는 법, 사패산을 돌아 내려와 포대능선을 오른다. 처음 가는 낯선 길이지만 부드럽고 촉촉한 산길의 감촉이 몸의 활력을 충전해 주는 것 같아 산행이 퍽 가볍다. 일망무애의 조망을 기대할 수 없는 능선 길이었지만 도봉산 산불감시초소를 지나 도봉산 전망대에 오르니 이게 웬일인가, 도봉의 영봉들이 희끗희끗 보이기 시작하지 않는가, 안개와 비구름이 떼를 지어 사패산을 넘어 수락과 불암산을 향해 파도처럼 밀려가고 있지 않는가,
 
도봉산 전망대를 오르니 안갯속을 지나오느라 보지 못한 사패산의 형상이 다 보이고 수락산과 불암산의 푸른 6월의 의연한 기상이 한눈에 들어온다. 얼마나 반가운 일인가, 지나온 길을 돌아볼 수 있다니, 멀리 북한산 삼각봉(백운대, 인수봉, 만경대)도 가물가물 다가오기 시작한다. 북한산의 주 능선과 우이능선과 송추계곡의 긴 능선까지 서서히 선명하게 눈앞에 펼쳐 보인다. 사위를 감싸고 있는 서울 강북과 양주와 의정부와 송추와 구파발 인근 도심 아파트의 즐비한 모습도 선명하다.
 

도봉에 오른다, 도봉은 나를 반긴다, 산은 단 한 번도 실망을 주지 않는다!
도봉에 오른다, 자운봉은 나를 반긴다, 산은 단 한 번도 실망을 주지 않는다!

도봉에 오른다, 도봉은 나를 반긴다, 산은 단 한 번도 실망을 주지 않는다.

오래오래 나를 기다려 온 도봉임이 틀림없다, 청명한 하늘과 청신한 바람, 비가 온다고 날이 흐리다고 결코 실망할 일이 아니다, 자운봉과 신선대와 만장봉과 선인봉을 온전히 마음에 들이니 아청鴉靑의 청명한 하늘 흰구름 사이로 6월의 햇살이 반짝이며 가루가루 부서져 내린다. 도봉에 오르니 도봉은 보이지 않고 자운봉과 선인봉과, 바로 곁에 뜀바위와 칼바위와 주봉과 병풍바위와 에덴바위가 나를 반긴다. Y계곡전망대에 올라앉아 도봉을 굽어보노라니 무념무상, 일망무애의 도봉이 훤히 다 보인다. 대지의 품에서 살아온 이 묘연한 기암영봉의 뜻은 무엇일까, 이 절애고봉을 지켜온 모성애의 무궁무진한 눈물이 눈길 머문 데마다 감탄의 꽃으로 핀다.
 
무하유지향無何有之鄕의 경계 없는 하늘과 대지! 백두 흰나비가 날아간 추억의 길도 보인다, 분명 천지동근天地同根, 대지와 하늘은 하나다, 산은 대지의 따스한 품에 핀 꽃이요 그 가슴에 흐르는 아늑한 언어다. 진실한 우주의 고백이다. 그 어떤 기준으로도 나눌 수 없는 하나의 하늘이요 하나의 대지다. 대지를 흐르는 초록의 바다가 6월의 산이다, 인간이 무슨 수로 이 우주 이 자연 이 대지 이 세계를 나눌 수 있으랴,
 
산의 품에 안겨 볼 일이다, 산의 숨결 산의 소리에 깃들어 살아볼 일이다. 이 세상 가난하다고 불평 원망할 일 결코 아니다. 산이 우리 곁에서 우리를 응원하고 있지 않는가, 산이 부르는 소리 사시장철 들려오지 않는가, 우리의 빈 마음을 가득가득 채워주는 산의 넉넉한 가슴, 우리의 지친 일상과 우리의 멍든 가슴을 치유해주고 젖은 눈시울을 닦아 주는 산의 마음!
 

우이능선 오봉에서 바라본 도봉의 영봉들, 뒤돌아 본 산의 모습 전혀 다른 얼굴이다!
우이능선 오봉에서 바라본 도봉의 영봉들, 뒤돌아 본 산의 모습 전혀 다른 얼굴이다!

도봉道峯! 자운봉紫雲峰! 자운紫雲! 얼마나 고운 이름인가, 얼마나 자연스러운 이름인가,

자운紫雲, 자줏빛 구름이라는 뜻으로, 상서로운 구름을 이르는 말로 자줏빛 의관을 두른 신선의 자태를 닮은 도봉과 자운봉과 선인봉과 만장봉과 신선대! 억겁의 해와 달과 별의 그림자가 머문 자리, 비와 바람과 눈보라가 스쳐 지나간 인연의 길목, 이 도봉 앞에서 우리는 얼마나 사소한 존재인가, 우리는 얼마나 작은 우주의 별빛인가, 잠시 머물다 지나가는 나그네인가, 도봉에 오르니 도봉은 보이지 않고 도봉의 뜻만 온 가슴에 일렁인다. 선인봉과 만장봉과 자운봉의 아름다운 이름만 반짝인다.
 
오랜 설렘과 기다림의 초록바다에 6월을 기다려 그리움처럼 떠 오른 도봉! 도봉의 봉우리들은 초록바다에 뜬 섬이다. 의로운 형제처럼 어깨를 틀고 늠연히 서 있는 크고 작은 섬들, 초록바다 위에 꽃 피어난 올망졸망한 눈망울 꽃들, 소담하고 부드러운 영봉의 눈빛들, 정결하게 맑힌 영봉의 얼굴들, 산은 한사코 인간의 경전이요 잠언의 묵시록이다, 산은 말이 없는 우주의 울림이요 신묘한 가르침이다, 이 장엄한 산의 위의威儀 앞에서 인간은 얼마나 작은 존재인가, 인간은 얼마나 낮아지고 낮아져야 할까,
 

오봉! 오묘한 하늘의 조화를 어찌 알까! 저 늠연한 자태를...
오봉! 오묘한 하늘의 조화를 어찌 알까! 저 늠연한 자태를...

 
멀리 아래로 떨어져 섬이 된 외로운 우이암牛耳巖(우이牛耳, 황소의 귀라고 명명한 옛 선인의 뜻은 분명 인간들에게 소의 귀처럼 마음 귀를 크게 열고 자연과 대지와 산의 소리를 들으라는 데 있을 것 같다.)이 그만 내려오라고 눈짓하는 것만 같다. 그렇다, 도봉이면 이제 그만이어도 좋다, Y계곡의 가파른 벼랑길을 기어올라 신선대와 도봉의 능선을 걸어보았으면 이제 내려가도 좋다, 어떻게 한술에 배부르랴, 어떻게 한번 만난 도봉을 다 읽으랴, 세 번 일곱 번은 더 만나야 도봉의 가슴 더 깊은 데 닿을 수 있지 않으랴, 지족불욕 지지불태(知足不辱 知止不殆), 만족함을 알면 욕되지 않고, 그칠 줄을 알면 위태롭지 않다고 하지 않던가, 오늘은 도봉이면 놀라운 기적을 누린 것이다.
 

우이암! 소의 귀로 산의 소리를 들으라는 뜻일까...!
우이암! 소의 귀로 산의 소리를 들으라는 뜻일까...!

 
그런데 이게 또 웬일인가, 뉘엿뉘엿 초여름 해 넘어가는 송추계곡을 좌로 두고 오봉五峰을 만나 잠시 놀다가 우이동계곡을 더듬어 내려가려 하는데, 눈앞에 오봉이 서둘러 다가와 나를 놀라게 하지 않는가, 오봉을 만난 이 행운! 의관 단정히 한 선인의 다섯 형제를 도봉 기슭 아늑한 곳에 나란히 세운 뜻은 무엇일까, 자칫 송추계곡 쪽으로 굽어들었더라면 만나지 못할 뻔했는데, 그 오봉의 진면목을 위에서 좌우에서 조망할 수 있었으니 어찌 도봉에서 누린 큰 횡재가 아니겠는가,
 
도봉을 종주한 날, 해거름 황혼의 품에 깃들어가는 도봉의 얼굴을 우이능선 갈참나무 사이로 언뜻언뜻 바라보면서 다디단 우이동 샘물에 목을 축인다. 도봉의 붉은 노을을 바라보니 애달픈 마음이 도봉의 품에 다시 깃들고 싶어 한다. 도봉은 나를 언제 또 부를까, 도봉이 부르는 소리에 귀 쫑긋 열고 살아야 할 성싶다.
 

늘 산이 부르는 소리 들린다. 해사한 산의 그림자가 눈앞에 어른거린다.
늘 산이 부르는 소리 들린다, 해사한 산의 그림자가 눈앞에 어른거린다 .
오봉을 바라보며, 산과 나는 하나가 되기를 서로 기다린다는 것을 알았다!
오봉을 바라보며, 산과 나는 하나가 되기를 서로 기다린다는 것을 알았다!

 
박두진 시인의 ‘도봉’이 떠오른다. 나와 다른 시대를 산 시인이지만 암울한 일제 강점기를 그 어디에도 마음 붙일 곳 없이 살아온 시인, 고독한 시인의 영혼의 가슴을 내 안에 들여 암송해 본다. 산이 아니면 의지할 데 없는 시인이 한 가닥 구원을 갈망하는 심경을 노래하였을 것인데, 오늘 하루 도봉의 길은 훗날 나의 시에서 어떻게 살아 꽃 피어날까,
 

인적 끊인 듯 홀로 앉은 산의 어스름, 메아리도 도봉의 품에 안기고 말리라!
인적 끊인 듯 홀로 앉은 산의 어스름, 메아리도 도봉의 품에 안기고 말리라!
​산 그늘 길게 늘이며 붉은 해는 넘어가고 황혼과 함께 별과 밤은 이어 오리라!
산 그늘 길게 늘이며 붉은 해는 넘어가고 황혼과 함께 별과 밤은 이어 오리라!

 
길게 도봉을 내려와 도봉산역에 이르니 도봉은 보이지 않고 내 안에 도봉의 그림자만 자욱하다. 도봉산역에 닿으니 걸음 수 32,836보, 24.66킬로미터가 나의 하루 길을 증거한다.
 

나의 하루!
나의 하루!

 
 
산새도 날아와
우짖지 않고
 
구름도 떠가곤
오지 않는다
 
인적 끊인 듯
홀로 앉은
가을 산의 어스름
 
호오이 호오이 소리 높여
나는 누구도 없이 불러 보나
 
울림은 헛되이
빈 골골을 되돌아올 뿐
 
산 그늘 길게 늘이며
붉게 해는 넘어가고
 
황혼과 함께
이어 별과 밤은 오리니
 
삶은 오직 갈수록 쓸쓸하고
사랑은 한갓 괴로울 뿐
 
그대 위하여 나는 이제도 이
긴 밤과 슬픔을 갖거니와
 
이 밤을 그대는 나도 모르는
어느 마을에서 쉬느뇨
 
(박두진 시인의 ‘도봉’에서)
 
 
20230603, 솔물새꽃의 도봉산일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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