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천석고황泉石膏肓*은 가슴에 스민 물소리와 함께 다시, 새로이, 깊어간다. 연하고질煙霞痼疾의 질고疾苦는 깊을수록 좋은 것 아니랴.
산은 오르는 곳이 아니다. 태고의 순결한 '나'를 찾아가는 길이다. 산에 어린 순수한 자연의 마음에 닿는 길이므로 결코 산은 오르는 곳이 아니다. '나'를 만나러 가는 깊고 고요한 여행이다. 그러므로 산에 닿는 길은 정결한 마음의 길이어야 하리라 믿는다.
긴 겨울 내내 눈 뜨면 바라보며 그리며 이름 부르며 갈앙渴仰한 설악! 설악동 천불동계곡! 맑고 밝은 아청鴉靑의 하늘과 물소리! 봄은 다시 천불동을 내게 보내왔다.
내 마음 저류를 타고 흐르는 천불동 물소리 다시 들린다, 흉금을 맑히는 저 물소리는 천혜의 은총이다, 조촐히 씻긴 암반과 너럭바위 하늘에 닿을 듯 정갈하게 꼿꼿이 차린 늠연凜然한 기암절벽! 암벽 틈새마다 푸름푸름 청춘의 기상과 생명의 경이를 자랑하는 소나무와 잣나무! 그윽한 계곡 사이를 쉼 없이 흐르는 명징明澄한 폭포수와 물바람! 여전히 나를 반긴다, 이심전심 나를 기다린 것이 틀림없다, 나의 등골을 타고 내린 오싹한 냉기 살갑게 내 안에 들이니 온 정신이 맑아진다, 그 기운 가슴으로 느낀다,
수천수만 개 물의 눈망울이 물의 눈빛들이 수정 같은 반짝임이 수많은 옥구슬이 섞이고 엉기고 구르며 하나의 화음으로 울리는 천불동! 맑은 물소리 물보라 그 무지갯빛 물의 노래! 천태만상千態萬象의 소리와 빛과 형상은 그 누구의 조화란 말인가,
긴 잠에서 깨어나 서서히 봄봄봄 노래하며 흐르는 물의 소리 물의 기상, 저 물처럼 맑고 밝게 우리 안의 꿈과 노래들도 느릿느릿 흐르기를 빌고 빈다,
“인생이란 세상에 태어날 때 털 올 하나 가지고 온 것이 없다. 우리가 세상을 떠날 때도 털 올 하나 가지고 갈 수는 없다. 물욕物慾의 허망함이 이러하다.”(김용준, <근원수필> ‘육장후기’ 127쪽에서 옮김)
불현듯 김용준(1904~1967)의 ‘근원수필近園隨筆’의 일절이 가슴을 적신다. 그는 인간 정신이 '순수純粹하다’는 것은 오직 종교의 세계와 예술의 세계에서 밖에는 찾을 길이 없다고 하였는데,
나는 여기에 자연의 세계를 당당히 포함시키고자 한다. 종교와 예술과 자연만이 순결한 정신의 근골筋骨을 강화해 주고 지켜주는 힘이 있다고 확신한다. 자연의 길과 사람의 길은 한결같아야 이 지구상에서 지금 생명을 누리고 있는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진정 ‘하나’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연의 길, 자연의 도道와 덕德을 숭앙하는 길을 고집해야 하는 까닭이다, 모두의 평강과 소망을 빌어본다.
*천석고황泉石膏肓 : 산수를 즐기고 사랑하는 것이 정도에 지나쳐 마치 고치기 어려운 깊은 병과 같음을 이르는 말. 유의어로 자연의 아름다운 경치를 몹시 사랑하고 즐기는 성벽을 뜻하는 연하고질(煙霞痼疾), 연하지벽(煙霞之癖)이 있다.
20230509, 솔물새꽃의 설악동일기에서
천불동계곡은 힐링 천국! 쉼, 회복을 누려보라! (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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