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샘바람 탓에 북한산 백운대 정상(해발 836)은 바람이 몹시 차다. 얼굴과 손이 한 겨울처럼 시리다. 점심 이후 느지막이 나선 해거름 산행이라 산길은 한가하고 고요하여 겨울과 봄의 길목, 계절과 계절의 사이를 흐르는 변화가 절로 느껴진다. 물의 소리와 결빙의 흔적! 만경대 백운대 인수봉, 이 세 영봉을 묶어 삼각산이라 부른다.
평등平等하고 무등無等한 산! 산은 언제나 열린 마음, 포근한 안식이다. 다정한 엄마의 품이다. 너그러운 산의 가슴, 잠시 산문에 안겨 있다 오니, 눈도 밝아지고 마음에 평안이 흐른다. 전신에 생기가 절로 감돎을 느낀다. 이 오묘하고 놀라운 산의 힘!
올해도 민달팽이 걸음으로 미음완보微吟緩步, 소요음영逍遙吟詠하며 한없는 산의 은총을 누리며 살고 싶다!
만경대 백운대 인수봉, 이 세 영봉을 묶어 삼각산이라 부른다. 구파발역에서 북한산으로 오르는 원효사 초입에 이르면 삼각산의 형상이 더 선명하게 잘 보인다. 단숨에 만경대까지 오르니 늠름한 산의 기상이 가슴에 들어온다. 오래도록 한참을 바라보고 있으면 만경대의 장구한 시간이 내게 들어와 나의 마음속을 차지하고 있던 온갖 번잡한 것들 다 내몰고 내 안에서 산이 된다.
노적봉 너머 멀리 영취봉 능선을 보고 있으면 설악의 공룡능선을 본 듯싶다. 서울 도성 안에 이 멋진 산을 품고 사는 시민들은 분명 천국을 사는 자들임에 틀림없다. 아일랜드에서 서울의 산을 보기 위해 날아온 청년들을 만난 적이 있었는데, 그들은 어디서나 산을 쉽게 오를 수 있는 대한민국 서울 시민은 천국을 사는 사람들이라고 부러워하였다.
인수봉! 백제의 시조 온조왕이 그의 형 비류와 이 인수봉에 올라 도읍을 정했다는 설이 전하는데, 마치 어린 아기를 업은 형상이라고 하여 부아산이라 부르기도 한다.
북한산 텃새, 참새목과에 속한 바위종다리새! 마치 나를 하루종일 기다리고 있었음일까, 암수 두 연인은 호젓이 아름다운 포즈를 나에게 오래도록 취해주었다. (사진을 잘 찍어보라고...) 정말 고마웠다! 그런데, 암수일 성싶은 이 두 마리 종다리새는 왜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을까, 인간과 다른 바위종다리새만의 움벨트를 가졌기 때문일 것인데, 이들을 진정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생각과 판단을 내려놓아야 할 것이다. 한 세계를 아는 일은 '나'를 먼저 비우는 일로부터 시작해야 하는 것이니까. 이 바위종다리새의 다정한 '거리의 미학'을 오래 잊지 못할 성싶다!
엊그제만 해도 완연한 봄날이었는데, 어제와 오늘은 한 겨울바람이 불어와 변덕스러운 봄날의 기상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손과 얼굴이 시리다. 꽃샘바람! 꽃샘바람은 더 고운 봄을 꽃피우려는 자연의 섭리인 것을 알기에, 그리고 훌쩍 떠나려 하는 겨울에 대한 섭섭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차디찬 꽃샘바람을 듬뿍 품에 안아 돌아왔다.
산문에 들면 언제 어디서나 파릇한 생기가 흐름을 느낀다. 산의 숨결 산의 향기 산의 기운이 내 안에서 꿈틀 하는 것을 안다. 산은 나를 들이고 나는 산을 들이고, 산은 내가 되고 나는 산이 되고, 고독한 존재의 운명은 산이나 나나 한 가지일 성싶다. 드디어 산과 나는, 나와 산은 조화 합일 주객일체 무아지경의 하나가 된다!
우리가 산을 찾는 일은 이 놀라운 체험을 누리는 일인지 모른다. 그러므로 어디든지 산문에 들어가는 것은 이 지상에서 가장 순실하고 거룩한 자연을 만나는 일일 것이다. 산만큼 태고의 숨결 무늬 향취를 잘 간직한 데가 이 땅 어디에 있으랴, 산은 영혼과 감정을 소유한 생명 그 자체다! 수많은 생명을 살리고 지키는 생명의 산실이 아니면 그 무엇이랴, 그러므로 이 산속에 드는 일은 아주 성스러운 일이다. 우리의 잃어버린, 아니 잊어버린 원시성 자연성을 회복하는 일인 까닭이다.
아무리 우리의 일상이 분주할지라도 지친 영혼이 산과 교감하며 산의 가슴을 읽고 느끼는 영적 만남을 게을리 하지 않고 자주 이어가야 할 까닭이 여기 있는지 모른다!
결빙의 얼음장 밑으로 봄의 뜨거운 심장 피의 빛 피의 소리 박동하는 봄의 생명이 흐르고 있다. 긴 겨울을 인내하고 긴 어둠의 강을 건너온 봄을 결코 소홀히 맞을 일이 아님을 안다. 봄은 참으로 오랜 시련의 밤과 함묵의 겨울을 건너온 개선장군 같은 풍모다. 온갖 풍상을 다 극복한 초월자임이 분명하다. 정말 봄은 우리 모두의 기다림, 환희, 기쁨, 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다... 찬란한 봄의 완성은 바로 우리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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