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제물론>은 ‘나’를 잃은 남곽자기 이야기로 시작해 꿈속에서 나비가 된 장자 이야기로 끝난다.
<장자>는 데카르트로 대변되는 서양 근대 이성이 보여준 자아 정체성이나 주체성에 관한 집착이 없다. 장자 철학은 ‘나’라는 정체성을 고집하지 않는다. 오히려 나를 버리고 다른 무언가로 되어가는 물화物化(사물이나 사람의 변화)의 과정에 주목한다. ‘나’라는 정체성을 고집하기보다 나를 버릴 수 있을 때 다른 무언가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고 한다.
‘소요유’에서 물고기 ‘곤’이 커다란 새 ‘붕’이 되듯이, ‘제물론’에서 장자는 한 마리 작은 나비가 되는 꿈을 꾸듯이, 모든 존재하는 것은 무언가로 변한다는 것입니다. 장자는 내가 옳다는 생각이나 고집과 집착을 버릴 때, 내가 알고 있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열린 생각, 느긋하고 넉넉한 마음이 다시 살아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장자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식 코기토가 아니라 차라리 라캉식의 ”나는 내가 생각하지 않는 곳에 존재하고, 내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에 가깝습니다. ‘나’라는 정체성에 갇혀 있으면 다른 무엇이 될 수 없다. 내가 알고 있는 것만 옳다고 고집하면 다른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 내가 아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면 아는 만큼만 보일 뿐이다, 라고 역설하지요.
장자의 <소요유>에서는 물고기 ‘곤’은 ‘대붕’이 되어 하늘 높이 올라 다른 시각과 넓은 시선으로 세상을 보게 된다. 그리고 <제물론>에서는 남곽자기는 자신을 다 비우고 들리지 않던 퉁소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됩니다. 드디어 앎의 눈이 열리고 앎의 귀가 뚫린 것이지요. <소요유>에서 앎의 장님이 눈을 뜨더니 <제물론>에서 앎의 귀머거리가 소리를 듣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나를 비울 때 결국 큰 앎의 눈과 귀가 열린 것이지요.
장자가 가르쳐주는 것은, 큰 앎(대지大知)은 많은 지식의 축적이 아니라 앎에 대한 열린 태도, 겸손한 마음이다. 큰 앎을 깨달은 사람은 내가 알고 있는 것이 반드시 옳은 것이 아닐 수 있다는 열린 태도와 내가 다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겸손한 마음을 갖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일까요? 장자의 <양생주養生主>는 그 길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앎을 추구하는 것도 삶을 위한 것인데, 작은 앎에 갇혀 지식만 추구하면 삶이 위태로워진다고 한다. 우리의 삶에는 끝이 있으나 앎에는 끝이 없기 때문. 끝이 있는 삶을 사는 인간이 끝이 없는 앎을 추구하는 것은 위태로운 일이다. 앎을 위해 살다가 위험에 빠지지 말고, 나를 버리고 자연스러운 흐름에 따라 삶을 사는 길이 잘 사는 길이라는 것이다. 앎을 위해 살지 말고 삶을 위해 살라는 것이다!
20230612, 솔물새꽃의 오금동일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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