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2년 하퍼스매거진에 내용의 일부가 처음 소개된 피터 톰킨스, 크리스토퍼 버드의 <식물의 정신세계>는, <식물의 신비 생활, The Secret Life of Plants>이라는 제목으로 미국에서 1973년에 출판되었다.
지은이 피터 톰킨스와 크리스토퍼 버드는 하버드 대학과 소르본 대학에서 생물학과 인류학을 전공한 저술가이다. 이 책은 1992년 <식물의 신비 생활>이라는 제목으로 우리나라에 소개되었으며, 1993년부터 <식물의 정신세계>라는 제목으로 바뀌어 지금까지 꾸준히 읽히고 있다. 이 책과 함께 생물 생태계에 대해 새로운 눈을 열어준 책으로는, 인간의 생각이 물에 전달되면 물이 얼었을 때 그 결정의 모양이 아름다워지거나 추해진다는 주장을 한 일본인 에모토 마사루의 <물은 답을 알고 있다>가 있다.
나는 <식물의 정신세계>을 읽는 내내 어린 시절 마구간에서 눈물을 흘리며 특별히 더 맛있게 끓인 여물인데도 (소죽, 우시장에 팔리게 될 소를 생각하고 정든 고마운 소를 향한 애잔한 마음을 담아 아버지는 평소보다 더 많은 곡식과 죽재를 넣어 소죽을 맛있게 끓이셨다.) 먹지 않고 되새김질도 하지 않은 채 울고 있었던 소의 눈망울이 떠올랐다. 온순하여 묵묵히 농사일에 순종한 참 고마운 황소! 농사일을 온전히 다 맡아해 온 고마운 우리 집 소는 아버지 어머니가 마당에서 하신 말씀을 분명 들었을 것이리라. 며칠 후면 읍내 우시장에 내다팔릴 자신의 처지를 소는 알고 있음이 분명하였던 것이다.
소가 사람의 말을 듣고 사람의 인정을 느끼는 영적인 동물이라는 것을 안 것은 한참이 지난 후였지만, 소를 읍내 시장으로 팔러가기 위해 소의 풍경을 끊고 굴레를 벗기고 드디어 마구간 문턱을 넘을 때면, 비로소 소는 참았던 울음을 터뜨리며 서럽게 운다. 눈자위를 흐르는 눈물도 흥건하다. (소의 서러운 울음소리를 나는 몇 번을 더 들으면서 자랐다.) 자신의 팔려갈 처지를 안 소는 문턱을 넘지 않으려고 네 발로 온 힘을 다해 버틴다. 마당을 지나 대문 문턱을 넘어야 할 때는 앞뒤에서 끌고 밀어도 소는 끄덕을 하지 않고 한참을 음~' 으음~' 흐느끼며 바위처럼 버티고 있는 것이다. 이런 날이면 우리 가족과 나의 하루는 얼마나 맘이 허전하고 슬펐던지... 그 아득한 옛날이 떠올라 이 책을 읽는 내내 식물이든 짐승이든 인정을 교유하고 감정을 통하며 지내는 것들과의 관계는 예사로운 일이 아님을 다시 실감한다. 목숨을 가진 모든 것들의 원초적 본능이려니 새삼 수긍하며 이 글을 쓴다.
식물에도 영혼이 있다고 주장한 19세기 독일의 철학자이며 생물심리학자인 페히너는 이렇게 말했다. “인간들이 어둠 속에서 목소리로 서로를 분간하듯이 꽃들은 향기로써 서로를 분간하며 대화한다. 꽃들은 인간들보다 훨씬 우아한 방법으로 서로를 확인한다. 사실 인간의 말은 사랑하는 연인끼리를 제외하고는 꽃만큼 미묘한 감정과 좋은 향기를 풍기지 않는다.”
1966년 어느 날, 미국 뉴욕의 타임스 스퀘어가 내려다보이는 빌딩 안에서 거짓말 탐지기 연구를 수행하던 백스터는, 불현듯 검류계(인간의 심리상태나 감정에 따라 바늘이 움직이는 거짓말 탐지기로 사용하는 기계)의 전극을 화초의 잎사귀에 갖다 대 보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그는 식물에 검류계를 대고 화초에 물을 주어 보았다.
실험 결과는 놀라웠다. 바늘의 움직임이 마치 감정의 자극을 받은 사람이 보이는 것과 흡사했기 때문이다. 혹시, 이것은 식물이 스스로 생각하고 느낀다는 증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식물의 지각 능력에 대한 위대한 발견의 시작이었기 때문이다. 백스터는 다윈 이래 식물에게 신경 조직이 있다고 말한 식물학자는 단 한 사람도 없었기 때문에, 그는 인간의 다섯 가지 오감각(눈 코 입 귀 살갗)이란 어쩌면 모든 자연이 공통으로 갖추고 있을 보다 ‘근원적인 지각 능력’을 가로막는 요소에 불과하다는 가정을 하기에 이른다.(인간의 기준으로는 모든 생물의 세계를 온전히 다 알 수 없다. 그러나 인간의 지각과 인식을 절대시한 사람들은 자기들 맘대로 식물을 인식하고 판단하려 하였다.)
결국 백스터는 인간의 감각기관에 의지한 인간의 지각 능력이야말로 극히 제한적이고 단편적일 수밖에 없다고 단정하고 다양한 식물의 세계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선입견이나 고정관념을 내려놓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고유한 식물 세계의 움벨트를 이해하는 일은 인간의 관점을 고집해서는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후 20세기에 접어들면서 많은 생물학자들과 과학자들이 초자연적인 식물의 정신세계가 실재하는지에 대한 확실한 해답을 얻고자 첨단 과학과 심지어는 물리학적 실험까지 시도하고 있다. 20세기 최고의 식물 연구가로 알려진 캘리포니아의 루터 버뱅크는 한 친구에게 이런 말을 한다.
“식물을 독특하게 길러내고자 할 때면, 나는 무릎을 꿇고 그 식물에게 말을 건넵니다. 식물에게는 스무 가지도 넘는 지각 능력이 있는데 인간의 그것과는 형태가 다르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에게 그런 능력이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선인장에 관한 실험 이야기인데, 나는 처음 집게로 선인장의 가시를 뽑아주면서 선인장에게 수시로 말을 걸어, 아무것도 두려워할 게 없다, 그러니 넌 이제 가시 따위는 필요 없어, 내가 너를 잘 보살펴 줄 테니까, 안심하고 가시 같은 것은 다 버려, 그 결과 마침내 가시 없는 선인장이 이 세상에 태어나게 되었다.”라고 적는다.
한편, 캘리포니아에 있는 IBM의 화학 연구원인 마르셀 보겔은 백스터의 실험을 재현하다가 식물이 유독 특정 인물에게만 반응을 활발히 보인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이렇게 적었다.
“인간이 식물과 교감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식물은 우주에 뿌리를 둔, 감정이 있는 생명체입니다. 인간의 편견이나 관점으로 본다면 식물은 장님이자 귀머거리나 벙어리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인간의 감성을 알 수 있는 대단히 예민한 생명체라는 것을 믿어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인간에게 유용한 에너지를 방출하고 있으며, 어떤 사람은 식물이 방출하는 그 에너지를 느낄 수도 있습니다.” 놀랍지 않은가.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고귀한 것임을 우리는 겸허히 인정하여야 할 것이다.
그 후, 보겔은 식물과 인간 사이의 교감이야말로 식물의 정신세계에 대한 수수께끼를 풀 수 있는 열쇠임을 깨닫고, 식물에게도 감정이 있다는 사실을 실험을 통해 입증해 보였다. 보겔은 한 실험에서, 마당에 있는 나무에서 이파리 두 장을 따다가, 하나는 방치해 두고 다른 하나는 가까이 두면서 다정하게 바라보고 만져주었다. 그 결과 방치해 둔 것은 금방 색이 변하며 시들어 버렸지만, 가까이 두고 정성을 기울여 돌봐준 이파리는 시간이 지나도 시들지 않고 싱싱한 상태를 오래도록 유지했다.
보겔에게 있어 식물에 대한 연구는 새로운 인간 삶에 대한 심각한 성찰과 반성을 제기한 대안이었다.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가 근원에서부터 서로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는 이와 같은 깨달음은, 지금껏 만물의 영장임을 자처해 온 인간의 무지와 오만과 독선, 아집과 탐욕에 대한 심각한 경종을 울리는 것이었다.
“자연은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조용히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만 자신의 진실을 보여준다. 이 자연의 진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수용함으로써 인간은 비로소 대자연, 곧 우주와 조화를 이루어 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보겔의 이러한 자연에 대한 발견과 새로운 인식이 진즉 우리에게도 보급되고 확산되어, 인간이 자연을 대하는 태도와 지향이 바뀌었더라면 산업화와 근대화 과정에서 지금처럼 자연은 훼손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4대 강 개발이라는 국가적 사업을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이를 생각하면 지도자나 나라의 정책을 결정하는 사람들의 독서 수준, 지적 발견과 인식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새삼 다시 깨닫게 된다.
1968년 도로시 리털랙 부인은 ‘음악이 식물에게 미치는 효과’에 대해 아주 흥미로운 실험을 시작하였고, 이 실험은 장차 큰 논쟁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도로시 부인은 록음악과 클래식 재즈 민속음악을 들려줬을 때 식물들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실험했고, 결과는 아주 놀라웠다. 식물은 록음악처럼 시끄러운 음악을 싫어하는 반면 바흐의 클래식 음악을 들려줬을 때는 꽃들이 스피커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것을 확인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우주 전기 재배>라는 책을 쓴 조지 스타 화이트 박사는 철이나 주석 같은 금속 조각을 과일나무에 매달아 놓으면 생장이 빨라진다는 것을 발견했다. 1920년대 초, 조르주 라호프시키라는 엔지니어는, 생명의 근원은 물질이 아니라 물질과 관련된 비물질적인 진동임을 시사하는 책들을 펴내기도 하였다. 그는 그 연구에서 “모든 생명체는 방사선을 방출한.”는 사실을 강조한 후, 모든 생명체의 본질적인 유기적 단위인 세포는 무전기처럼 고주파를 발사하거나 흡수할 수 있는 전자기 방사체라는 아주 혁명적인 이론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많은 초심리학자들은 인간을, 지구와 우주에 펼쳐져 있는 ‘생명의 그물’을 이루는 한 부분이라고 보고 있다. 그들은 인간이 바이오플라스마를 통해 우주와 연결되며, 다른 사람의 기분이나 질병에 반응하는 것처럼 별들의 변화에도 반응을 보인다는 것이다. 초심리학자들은, 인간이 살아있는 식물들과 직접 교신을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바이오플라스마에 의해서라고 믿고 있다.”
“식물은 단순히 살아 숨 쉴 뿐 아니라 영혼과 개성을 지닌 생명이다. 식물이 그저 단순한 자동인형과 같은 존재일 뿐이라고 우겨 대는 것은 바로 무지몽매한 인간들뿐이다. (우주적, 생태적 관점에서 보면 늘 인간이 문제인 것은 분명하다!) 이 행성을 오염과 부패로부터 구출하여 다시금 푸르른 본래의 낙원으로 환원시키려는 변환의 시도에 있어서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식물이 인간과 협력할 뜻을 지니고 있으며 또한 그런 능력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식물에 대한 재해석을 소개하고 있는 <식물의 정신세계>는 고대 인도나 아리스토텔레스 시대로부터 언급되어 온 ‘식물의 정신적 능력’에 대한 모든 논의와 쟁점을 다시 정리하고 있다. 그 결과 이 저서는 식물의 놀라운 비밀을 파헤치는 데 그치지 않고 이를 통해 우주 전체를 사색함으로써 ‘식물학’을 새로운 차원의 ‘생명철학’으로 탈바꿈하는 데 크게 기여한 셈이다.
식물도 우리 인간처럼 생각하고 느끼고 기뻐하고 슬퍼한다는 것. ‘예쁘다’는 말을 들은 난초는 더욱 아름답게 자라고, ‘볼품없다’는 말을 들은 장미는 식물 스스로 자신을 자학한 끝에 시들어버린다는 실험 결과를 소개하고 있다. 또 어떤 식물은 바흐나 모차르트 같은 클래식 음악을 더 좋아하고, 어떤 식물은 시끄러운 록음악을 좋아한다고 소개하는 것을 읽으면, 그동안 식물의 각기 다른 다양한 특성, 그 고유한 움벨트를 고려하지 않고 인간의 생각과 의지대로 식물을 해석하고 그 고귀한 생명성을 짓밟고 억압해 온 인간의 과오는 무서운 폭력이었음을 새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저자도 <식물의 정신세계> 머리말에서 언급하고 있듯이, 우리가 산이나 들에 가거나 숲이나 정원에서 수많은 나무나 꽃들과 함께 있을 때면, 우리의 마음은 차분해지고 아늑한 평온을 회복하는데, 이것은 영적인 충만감에 젖어 있는 식물의 심미적 진동을 인간이 본능적으로(거의 반사적으로) 느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여러 식물과 인간은 끊임없이 교감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더 말할 것도 없이 식물도 우리와 함께 의지하고 있는 이 우주에 뿌리를 내린 감정이 있는 생명체이다. 전 식물 생태계를 오직 인간의 관점과 지배적 논점으로 해석하고 판단하려 하기 때문에 식물이 지닌 영적인 특성, 곧 식물의 고유한 움벨트를 망각하고 만다는 것을 우리 인간은 겸허히 반성적 성찰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 인간은 이제 분명히 알아야 한다. 이 지구상에 살아 있는 생명종은 인간 말고도 헤아릴 수 없는 다양한 생명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 생명의 건강한 삶이 있어야 이 지구상의 인간의 건강한 삶도 가능하다는 것을, 그리고 인간은 겸허히 다른 생명종의 존엄함을 인정해야 한다. 오직 인간중심의 개발과 지배의 논리를 더 이상 고집해서는 안 된다는 것도 투명하게 인식해야 한다.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은 그 생명성이 고귀하고 개별적이며 유일하다는 것도 이젠 겸허히 인정해야 한다. 이 길만이 '내'가 잘 사는 길이요, '우리' 함께 잘 사는 길로 나아가는 것이다. 인간은 이제 더 낮아져야 한다. 더 이상 다른 생명종의 희생을 전제로 한 개발과 경제적 유익을 얻으려는 탐욕은 허용될 수 없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20230308, 솔물새꽃(김삼규)의 오금동일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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