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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생각하기 위한 독서

'한국 문학의 위상' - 문학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by 솔물새꽃 2023. 3.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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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문학)은 영혼을 살리는 봄비다, 영혼을 푸르게 하는 봄의 햇살이다!
책(문학)은 영혼을 살리는 봄비다, 영혼을 푸르게 하는 봄의 햇살이다!

김현의 <한국 문학의 위상> , 문학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를 이 봄날 다시 읽는다. 책은 어떻게 읽는 게 옳을까, 서평은 어떻게 쓰는 걸까, 어떤 책 위주로 읽어야 할까, 책을 읽으면서 이런 질문이 자연스럽게 꼬리를 물고 일었다.

 

김현은 지상에서의 마지막 3년 동안 병마와 싸우며 책을 읽고 글을 쓰며 영화를 보고 음악을 듣고 연극을 봤다고 한다. 모든 굴레와 의무로부터 자유로운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의 독서일기에는 고독한 생애의 길에서 모질게 추구한 이 모든 문화적 경험이 함께 담겨 있다.  20세기 최고 평론가의 평범한 책 읽기와 쉬운 글쓰기를 통해 나는 아마도 주눅 들지 않고 앞으로도 책을 읽고 글을 쓸 수 있을 거란 용기를 얻었다. 그것은 작지만 큰 소득이었다.

 

김현을 오래 잊고 있었다. 그가 남긴 평론집 가운데서도 꽤 알려진 <한국 문학의 위상>(문학과 지성사, 1996)을 다시 폈다. 48세에 요절한 김현이지만, 그는 생전 평론가 가운데서도 가장 열심히 책을 읽고 가장 글을 잘 쓴 사람으로 인정받았다. 그의 독서량과 열정은 주위 동업자들사이에서도 꽤나 유명했다. 오늘날 학자들이나 평론가들, 소설가들의 문제점은 그들이 책을 열심히 읽지 않는 것이라고들 한다. 평론가들이 평론을 하는 시인이나 소설가의 작품을 읽지 않고 시인이나 소설가의 이름을 가지고 평론을 한다고들 한다. 하지만 그는 평론가 가운데서도 열혈 독자였다는 사실만은 후대에 평가받고 본받을만한 것이라고 확신한다.

 

본격적인 문학평론을 지향하는 김현의 <한국 문학의 위상>1970년대 후반, 계간 <문학과 지성>2년간 연재한 글을 1977년 묶어 펴낸 평론집이다. 이 책의 가장 중심이 되는 주제는 <문학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서 김현이 밝힌 문학의 효용과 목적이다. 이 책이 나온 지 30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문학을 평생의 업으로 삼는 작가들과 문학을 사랑하는 독자들에게 의미 깊은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다.

 

책 읽기의 행복&#44; 책 읽는 문화&#44; 어른들이 책 읽는 거리 공원 지하철 문화!
책 읽기의 행복, 책 읽는 문화, 어른들이 책 읽는 거리 공원 지하철 문화!

그가 제기한 문제의식과 해답은 문학에만 한정되는 것도 아니다. 왜 우리는 문학을 하며 왜 문학을 읽는가,라는, 질문은 왜 책을 읽고 글을 쓰는가.’라는.’ 질문으로 치환할 수 있어서다. 그런데, 김현은 이 질문을 어린 시절 자신의 베갯머리에서 수많은 이야기를 들려주던 어머니에게 듣는다.

어머니의 문제의식은 남은 일생 내내 나에게 써먹지 못하는 문학은 해서 무엇하느냐’는’ 것이었다. 판사나 검사가 되어 세상 권력을 틀어쥐길 바라셨던 그의 어머니는 책 읽기를 좋아했고 문학을 전공했던 그에게 이런 아쉬움을 죽을 때까지 토로했단다.

 

"확실히 문학은 이제 권력에의 지름길이 아니며, 그런 의미에서 문학은 써먹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문학은 그 써먹지 못한다는 것을 써먹고 있다. 문학을 함으로써 우리는 서유럽의 한 위대한 지성이 탄식했듯 배고픈 사람 하나 구하지 못하며, 물론 출세하지도, 큰돈을 벌지도 못한다. 그러나 그것은 바로 그러한 점 때문에 인간을 억압하지 않는다." (김현 <한국 문학의 위상> 28쪽)

 

여기에 김현은 덧붙인다. 문학은 유용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을 억압하지 않는다. 억압하지 않는 문학은 억압하는 모든 것이 인간에게 부정적으로 작용한다는 것을 드러내준다. 그리하여, 인간은 문학을 통하여 억압하는 것과 억압당하는 것의 정체를 파악하며 그 부정적 힘의 영향을 간파할 수 있다. 그 이후 무엇이 남는가. 부정을 긍정으로 바꿔야 할 필요성, 즉 세상을 바꿔야 한다는 당위를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것이다.

 

이 말 뜻을 우리 삶에 연결해 보자. 경제활동을 비롯한 모든 탐욕은 쓸모 있음을 전제로 그 생명력을 이어간다. 돈을 위해 시간과 건강이란 대가를 지불한다.. 유용성이란 당근은 억압이란 채찍을 동반하는 것 아닌가. 반면, 문화란 돈이 되거나 당장에 이득은 없지만 사람에게 정신의 휴식을 제공하며 삶의 의미를 건네는 수단이다. 그것은 사람을 억압하지 않고 영혼에게 숨 쉴 자유와 시간을 준다.

 

인생이 유용성(돈)만 추구한다면 삶은 절름발이&#44; 영혼 없는 동물이 되고 말 것이다!
인생이 유용성(돈)만 추구한다면 삶은 절름발이, 영혼 없는 동물이 되고 말 것이다!

김현이 문학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장에서 다룬 문학의 효용에 대한 견해는 상당한 정치성을 함축하고 있다. 쓸모없는 문학이, 권력이 되지 못하는 문학이, 돈과 밥이 되지 못하는 문학이, 세계를 바꿀 수 있다는 거대한 반전으로 그의 논설에선 탈바꿈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첫째 단순히 문학이 팍팍한 일상에 여유를 주고 삶의 무미건조함을 이겨내는 수단으로써 갖는 역할이다. 이때 문학은 누군가의 삶의 질을 잠시나마 끌어올려줄 것이며 인생의 의미를 성찰하게 한다.

 

둘째 문학을 통해 사람들이 세상을 읽는 힘을 기르는 것이다. 문학을 자주 접하는 이들은 한 권의 책에 대한 독해력을 끌어올리는 일에 능통해진다. 문학은 삶과 세계를 다루는 것이다. 결국 문학을 많은 사람들이 접할수록 세상의 흐름을 분석할 줄 아는 교양인이 늘어난다는 것이다.

 

15세에 학교를 중퇴하고 아일랜드 국립박물관과 런던 대영박물관에서 독학하며 20세기 최고의 영국 극작가로 성장한 버나드 쇼는 이런 말을 했다. "지성을 계발하고, 미적 취향을 즐기며, 시와 음악과 그림과 책을 감상하며 건강한 문화적 삶을 소비할 줄 아는 시민을 양산해 내야 인류에게 미래가 있다" 한 나라의 정치가 후진적이고 한 나라의 지도자가 함량 미달인 것은 누구 탓인가. 자못 숙연해지는 말이 아닐 수 없다. 대의 민주주의 제도를 가진 나라에서 대표는 투표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고, 유권자는 기권하거나 자질이 부족한 인물에게 투표함으로써, 그 사회를 후진적이고 함량 미달인 정체 상태로 내모는 것이다. 김현은 1970년대 그 엄혹한 독재 시절에, 거리의 투사로서가 아닌 글 쓰는 평론가로서 독재 체제의 후진성을 비판하고 사회 개조의 필요성을 역설한 것 아닐까.

 

김현의 주장에 따르면 사람은 쓸모없는 문학, 즉 돈이 되지 않는 책 읽기에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다는 점이다. '쓸모 있는 일' (돈벌이가 되는  일)만 하는 사람들은 (돈과 육체의) 노예의 삶에 익숙한 것이기 때문이다. 인생에서 유용성은 무시할 수 없다. 하지만, 그것만이 전부라면 삶은 절름발이, 영혼 없는 동물이 되고 말 것이다. 문학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라는 김현의 질문에 대한 가장 분명한 답이 거기에 있었다. 세상의 진실을 스스로의 힘으로 읽어내는 힘, 바로 독해력을 기르기 위해서다.

 

팍팍한 일상의 여유&#44; 삶의 무미건조함을 이겨내 힘&#44; 자연을 감촉하는 사이&#44; 틈!
팍팍한 일상의 여유, 삶의 무미건조함을 이겨내 힘, 자연을 감촉하는 사이, 틈!

 

(솔물새꽃의 오금동일기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