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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생각하기 위한 독서

오월은 지금 가고 있다!

by 솔물새꽃 2023. 5.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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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하늘 저 초록의 물결 다보록히 출렁이는 능선을 보라, 우리의 가슴은 부요한 여유를 누릴 것이다!
저 하늘 저 초록의 물결 다보록히 출렁이는 능선을 보라, 우리의 가슴은 부요한 여유를 누릴 것이다!
아청 5월의 하늘을 머리에 두고 사는 이는 구원의 하늘을 꿈꾸는 자이리라!
아청 5월의 하늘을 머리에 두고 사는 이는 구원의 하늘을 꿈꾸는 자이리라!

오월

 

五月은 금방 찬물로 세수를 한 스물한 살 청신한 얼굴이다.

하얀 손가락에 끼어 있는 비취가락지다.

오월은 앵두와 어린 딸기의 달이요,

오월은 모란의 달이다.

그러나 오월은 무엇보다도 신록의 달이다.

전나무의 바늘잎도 연한 살결같이 보드랍다.

 

스물한 살 나이였던 오월,

불현듯 밤차를 타고 피서지에 간 일이 있다.

해변가에 엎어져 있는 보트,

덧문이 닫혀 있는 별장들,

그러나 시월같이 쓸쓸하지는 않았다.

가까이 보이는 섬들이 생생한 색이었다.

 

得了愛情痛苦 (득료애정통고 - 얻었도다, 사랑의 아픔을)

失了愛情痛苦 (실료애정통고 - 잃었도다, 사랑의 고통을)

 

젊어서 죽은 중국 시인의 이 글귀를

모래 위에 써 놓고 나는 죽지 않고 돌아왔다.

 

신록을 바라다보면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즐겁다.

내 나이를 세어 무엇하리. 나는 오월 속에 있다.

연한 녹색은 나날이 번져가고 있다.

어느덧 짙어지고 말 것이다.

머문 듯 가는 것이 세월인 것을.

유월이 되면 '원숙한 여인'같이 녹음이 우거지리라.

그리고 태양은 정열을 퍼붓기 시작할 것이다.

밝고 맑고 순결한 오월은 지금 가고 있다.

 

-- 피천득의 <오월五月>

 

모란, 오월의 꽃, 나의 고향 강진 모란공원의 모란이 만개하였다!
모란, 오월의 꽃, 나의 고향 강진 모란공원의 모란이 만개하였다!

 

5월의 팜므파탈, 모란! 꽃을 오래 보고 있으면 꽃이 되는 것을 느낀다.
5월의 팜므파탈, 모란! 꽃을 오래 보고 있으면 내가 꽃이 되는 것을 느낀다.

 

나는 해마다 5월이 오면 피천득의 <오월><수필>을 읽는다.

학창 시절 교정의 오월이,

무등산 기슭 풍향동 범두골의 따스한 오월의 햇살이 눈부심을 느낀다.

 

(고등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이 글을 암송하던 설레는 감동이 지금도 아슴히 떠오른다) 

이 글을 읽을 때마다 내 영혼의 들과 강은 풋풋한 삐비꽃 찔레꽃 청보리 향기 넘실거린다.

고향의 흙냄새와 탐진강 물살에 반짝이는 은빛 윤슬도 눈에 어른거린다.

아득한 유년의 봄날 가리마 같은 논두렁 길을 한들한들 걷고 있는 나를 만나기도 한다. 

시공을 초월하여 세계와 하나 되는 정서적 융합을  체험하는 '5월'의 매혹적인 이 힘!

 

유유자적悠悠自適 미음완보微吟緩步하며 강을 따라 걷다가 강이 끝나는 구강포에 다다랐을 때,

나는 어린 시절 난생처음 '죽음' '이별'이라는 숙명적인 한계와 슬픔을 만났다.

얼마나 호젓하고 서러웠던지 집으로 오는 내내  훌쩍이며 돌아왔던 것이다.

그러니 오월이 와서 이 글을 읽으면

마음에 잔잔한 애수와 통증이 물결치는 것은 당연지사가 아니랴.

맑은 눈물처럼 흐르는 탐진강과 탐진강에 떠 흐르는 아청鴉靑의 하늘은

그때부터 나의 가슴 배광이 되었다! 

 

남도 3대 강(섬진강 영산강 탐진강)의 하나인 탐진강이 긴 여정을 마치고 남포앞바다에 와서 고단한 몸을 푼다!
남도 3대 강(섬진강 영산강 탐진강)의 하나인 탐진강이 긴 여정을 마치고 남포앞바다에 와서 고단한 몸을 푼다!

 

여느 세월처럼 지금 오월이 와서 가고 있다.

'오월'을 읽으면 작가 피천득 내면의 순결함과 고상함, 낭만적인 멋, 풍미에 흠뻑 젖는다.

(누구의 글이든 흠뻑 젖어보려면 '나'를 온전히 비워낸 다음 읽어야 글 속에 빠질 수 있다.)

 

그윽한 인품을 품은 작가의 글이나, 음악이나, 꽃이나, 마음 따뜻한 사람의 향기는 

우리의 영혼을 취하게 만든다.

그 향기에 젖으면 때를 잊고 끼니를 걸러도 감동으로 들뜬다.

'인생은 아주 사소한 인연과 쾌감으로 인해 아름답다'는'

말이 정말 공감이 간다.

 

다시 5월이 왔다, 지금이 그 5월이다,

연둣빛 4월의 언덕을 넘어와  초록의 바다 5월을 건넌다. 

나의 5월은 또 어떻게 그려질까, 어떤 기억으로 남을까, 

영원히 머물러 있을 오월이 어디 있으랴,

이 순후한 5월을 몇 번을 더 살 수 있을까,

 

더 푸르게 5월을 살 일이다! 세속의 이해관계를 떠나 새처럼 물처럼 꽃처럼 솔향기처럼 그렇게, 그렇게...
더 푸르게 5월을 살 일이다! 세속의 이해관계를 떠나 새처럼 물처럼 꽃처럼 솔향기처럼 그렇게, 그렇게, 오월의 흐름에 젖어볼 일이다!

 

분명한 것은 금세, 곧, 서둘러, 오월도 우리 곁을 떠나고 말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러고 나면 6월은 더 풍성한 녹음과 몰라보게 장성해버린 원숙한 신록으로 다시 다가올 것이다.

때가 되면 우리가 탄 기차는 이렇듯 어김없이 다음 역을 향하여 달리고 만다.

 

밝고 맑고 순결한 오월은 지금 가고 있다.

지금, 5월, 출렁이는 초록의 바다를 맘껏 즐길 일이다! 

5월의 팔팔함과 푸르름을 뽐내며 살 일이다! 

 

 

20230503, 솔물새꽃의 남한산일기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