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은 나를 만나는 길이다. 나를 찾아 떠나는 길이 여행이다. 그 길에서 무수한 타인과 세계를 만나 새로운 앎과 삶을 배워 돌아오는 길이다.
나의 앎과 삶을 반추하면서 가슴 밑바닥 저류를 흐르는 상념이나 벌써 아득한 세월의 강을 건너버린 추억과도 해후하는 길이 여행이다. 여행의 길에서 우리의 영혼은 봄 햇살처럼 밝아지고 마음의 뜰에 새 움이 나기도 하며 천불동의 폭포수처럼 탱글탱글 맑은 구슬이 흐르기도 한다. 마음과 몸이 새로이 회복되는 말로 다 형언할 수 없는 기쁨과 보람을 누리는 길이 여행이다.
어찌 보면 우리가 살아가는 길은 하루하루가 여행의 여정이요 그 연속인지 모른다. 아침에 눈 뜨면 우리는 난생처음 떠나 보는 ‘하루’ 길의 나그네가 된다. 그리고 ‘하루’의 길이 다 하는 저녁이면 다시 집으로 돌아와 ‘하루’의 보람과 아쉬움과 아픔의 이삭을 고르며 단 한 번의 나의 ‘하루’와 덤덤히 결별한다. 다시 내일의 ‘하루’를 또 기다리며 새로운 여행을 위해 숙면에 드는 것이다.
우리가 아침이면 맞는 하루하루가 어찌 어제와 똑같은 하루일 수 있으랴, 오늘 이 ‘하루’는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을 ‘하루’요, 내가 난생처음 살아보는 ‘하루’인 것이다. 그 낯선 새로운 세계를 매일 모험하듯 여행하며, 그 길에서 돌아오는 길이 인생의 여정인 것이다. 그러다가 <어린왕자>(셍떽쥐베리)의 ‘어린왕자’처럼, <님의 침묵>(만해 한용운)의 ‘님’처럼 지상의 모든 인연을 차마 떨치고 떠나는 것이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운명인 것이다.
다시 생각해 보면 우리는 저 사막(광야)의 유목민이나 다름없다. (노마디즘NOMADISME : 프랑스 철학자 들뢰즈의 저서에서 현대 철학 개념으로 사용한 용어, 특정한 가치와 삶의 방식에 얽매이지 않고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바꾸어 나가며 창조적으로 사는 인간형, 또는 여러 학문과 지식의 분야를 넘나들며 새로운 앎을 모색하는 인간형을 이르는 말.)
우리는 물과 풀을 찾아 떠나는 것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은 사막의 베두인이나 투아레그인의 후예인지 모른다. 특히, 오늘날 현대인 모두는 늘 ‘떠남’(여행)을 준비하고 살아야 하는 유목인, 흐름 위에 보금자리를 친 노마드NOMADE족이 아닐까,
아니다, 틀림없이 현대인은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바꾸어 나가며 창조적으로 살아야 하는 노마드족의 피와 영혼의 혈통을 이어받은 광야(사막)의 유목민일 것이다. 늘 지금, 오늘과 작별하고 어디론가 '떠남'을 나서야 하는 유랑하는 노마드인! 그렇지 않고서야 급변하는 변화의 흐름을 따를 수 없기 때문이다. 오늘날 자고 나면 변하는 세상을 보라, 쏟아지는 신제품 스마트폰과 다양한 생활 전자기기, 급속도로 확산해 가는 인공지능의 역할, 자동화시스템, 우후죽순처럼 번성하는 신종 기업들, 신종 언어들, 신종 문화들, 신종 유행어들... 잠시 눈감고 머물러 있다 보면 오래된 낡은 사람으로 낙오하고 마는 세상이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이 아닌가.
잠시 이런 생각을 하는 동안, 시속 삼백이 넘는 속도로 질주한 고속열차는 봄의 풍광을 지긋이 감상할 틈도 허용하지 않은 채 순식간에 나의 육신을 대전에 밀쳐놓고 말았다. 나의 영혼은 아직도 서울 언저리 어디쯤을 벗어나지 못한 채 봄의 길을 쉬엄쉬엄 싸목싸목 음미하며 걸어오고 있는데...(어느 미래학자가 지적한 것처럼 현대인은 몸과 마음이 분리된 채 살아가고 있음이 분명하다. 말하자면 유체 이탈遺體 離脫, 영혼이 육체에서 벗어나 분리된 채 살아가고 있다.)
가방에 넣어 온 무사 앗사리드의 <사막의 여행자>를 오랜만에 다시 건성으로 넘겨 본다. 2006년 프랑스 르네상스 출판사에서 <사막에는 교통체증이 없다>란 제목으로 진즉 출간된 이 책은 2007년 ‘문학의 숲’ 출판사에서 <사막의 여행자>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간되었다.
<사막별 여행자> 무사 앗사리드라는 소년은 유목 생활을 하는 투아레그족의 후예다. 그는 어느 날 취재를 위해 아프리카 사막을 방문한 프랑스 여기자로부터 책 한 권을 선물 받는데, 소년은 책 속의 그림들에 매혹되었고, 그날 이후 오직 한 가지 생각에 사로잡히고 만다.
책 속 그림에 나오는 어린 꼬마(‘어린왕자’)의 이야기가 궁금한 소년 무사는 부모를 설득하여 학교에 가 프랑스어를 배우기 시작한다. 유럽에서 온 기자로부터 받은 책을 읽기 위함이었다. 그 후 소년은 수십 킬로미터가 넘는 거리를 날마다 걸어가 글을 배웠는데, 마침내 소년이 알게 된 그 책은 유명한 생떽쥐뻬리의 <어린왕자>였다. 소년은 책 속의 ‘어린왕자’의 슬프고도 아름다운 풍경은 바로 사막에 사는 자신들의 모습과 같다는 것을 깨닫고 큰 감동을 한다.
프랑스로 가서 셍떽쥐뻬리를 만나겠다고 굳게 마음먹은 무사 앗사리드는 <어린왕자>의 작가 셍떽쥐뻬리가 이미 고인이 된 사실도 모른 채 스무 살 무렵이 되어서야 극적으로 프랑스에 도착한다. 사막의 투아레그인 청년 앞에 상상할 수 없는 마법과도 같은 문명 세계가 펼쳐질 줄을 어떻게 알았단 말인가.
청년이 된 무사 앗사리드는 문명사회의 온갖 풍요와 화려한 문화에 감탄하면서 동시에 그처럼 넘쳐나는 많은 것을 소유하였지만 결코 행복하지 못한 생을 살고 있는 프랑스인을 발견한다. 삶의 순간순간을 소중하게 음미하지 못하고 앞만 보며 질주하는 문명인들... 이웃과 단절되어 외롭게 오직 자신의 욕망만을 좇아 살아가는 도시의 많은 사람은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잊은 채 방황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들은 기적으로 가득한 많은 것을 소유하였지만, 정작 가장 소중한 것, 즉 지금 이 순간의 행복을 소유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사막의 유목민인 베두인이나 투아레그인은 가진 것이 거의 없다. 철저히 자연의 흐름에 순응할 뿐이다. 항상 떠남을 준비하고 살아야 하는 길이 그들의 생애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늘 새로운 세계를 향한 기다림과 잠시 머물러 있는 곳으로부터 떠남을 준비하며 산다. 광야의 유목민에게는 떠남에 대한 망설임과 두려움과 미련이나 집착은 전혀 없다. 떠나는 것이 그들의 삶이요 길이라는 것을 사막의 오랜 삶과 자연으로부터 진즉 배워서 깨달았기 때문이다.
유목민 무사의 삶은 철저히 단순하고 문명의 이기라고는 극히 최소한으로 국한되어 있으며 자연과의 친밀한 교감만이 있을 뿐이다. 다만 유목민들에게는 자연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자연의 의지를 이해하는 것이 더없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자신의 생명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수도꼭지만 돌리면 펑펑 쏟아지는 물도 없고 자동차도 없다. 그러나 사막의 유목인은 모든 것이 단순하다. 소유한 물건도 단순하고 생각도 단순하다. 이들은 자신이 누군인지도 분명히 알고 있다. 그러나 문명 사회인의 삶은 그렇지가 않다는 것이다. 물질의 풍요로움 속에서 사는 현대인은 자기 자신을 잃고 복잡한 일상과 문명의 이기에 이끌려 살아가고 있다. 아예 자연의 소리와 흐름과 이웃의 삶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문명인이 귀 기울이는 것은 자연보다는 뉴스나 신문이나 소유의 삶을 사는 것이다. 문명인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으면 시간을 잃어버린다고 여긴다. 그러나 투아레그인은 다르다. 그들에게 시간은 잃거나 얻거나 소유할 수 있는 대상이 결코 아니다. 단지 ‘살아가는’ 것이다. 존재할 뿐이라는 것이다.
사막의 유목민은 자연 생명의 온갖 변화와 신호에 관심을 기울이며 살아간다. 물과 풀을 찾아 새 삶을 늘 모색하는 유목민은 지도나 표지판이나 길 안내 프로그램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별과 은하수에게 길을 물어 방향을 결정한다. 모든 것이 단순하다. 그들에게 하루의 시간도 아침과 점심과 저녁이 있을 뿐이다. 시간을 재지 않고 돈이나 집이나 소유한 물건의 양을 셈하지 않는다. 언제고 떠나야 할 때를 예비하며 살아야 하는 베두인이나 투아레그인에게 필요 이상의 소유는 큰 구속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가장 아름다운 덕목은 단순함과 가벼움이다. 이 단순함과 가벼움이 행복의 원천이라고 자연스럽게 체득된 것이다. 오직 그들이 살아온 시간만이 그들의 길을 동행할 뿐이다.
인간은 육체를 가진 존재이기 이전에 영혼을 가진 존재라는 명제를 몸소 실천하며 자연의 흐름에 철저히 순응하며 살아간 것이다.
다시 정리하면, 무사 앗사리드의 <사막별 여행자>는 사하라 유목민 투아레그족 열세 살 소년이 어느 날 사막 오지에서 셍텍쥐뻬리의 <어린왕자>를 프랑스 여기자로부터 얻어 읽은 다음, 그의 생과 영혼에 휘몰아친 폭풍 같은 반향을 적은 글이다. 비인간적이며 허구적이고 맹목적인 삶으로 이루어진 문명 사회인에게 가난하지만 소박하고 단순한 삶을 통해 늘 진정한 행복을 건져 올리는 투아레그인의 지혜를 가르쳐주는 글이다.
봄이 벌써 훌훌 우리 곁을 금세 떠나가고 있다. 봄이 가면 여름이 올 것이고, 무성한 여름은 늙으면 금세 가을이 될 것이다. 가을은 오래 머물지 않고 잿빛 침묵의 심연으로 사라질 것이고 긴 동면을 하며 기다림과 인내의 강을 잠잠히 다시 건너야 할 것이다.
곰곰 생각할 이유도 없이, 우리의 길은 짧은 생애의 강을 떠나는 것이다. 어제와 오늘의 길이 떠남과 만남의 연속이듯 우리는 순간순간 떠남과 새로운 만남의 길목에서 살아가고 있다. 삶은 떠남이다. 삶은 길을 떠나는 나그네의 여정이다. 머물러 있을 새가 없는 새로운 물과 초원의 풀을 찾아 유목하는 광야의 베두인이나 투아레그족처럼, 우리는 노마디즘의 길을 찾아가는 유목인이다. 어디든 새로운 세계를 향해 떠나야 하는 것이 우리의 고독한 삶이요 유일한 앎일 것이리라.
영혼의 양식을 멀리한 채 하루하루 자신을 무의미하게 소멸시키며 오직 부와 성공과 경쟁을 향해 달려가는 현대인은 아무것도 가진 게 없지만 저마다 행복하다고 말하는 사막의 유목민 투아레그인의 순박한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할 것이리라. 그러나 문명 세계 사람들은 이와 반대로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도 별로 행복을 느끼지 못하고 사는 사람이 많은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만물이 소생하는 봄 여름이 있고 가을과 눈 내리는 긴 겨울이 있다. 꽃이 피고 숲에서는 새가 노래하며 산과 들에는 온갖 곡식과 채소와 실과가 풍성하다. 삶을 윤택하게 해주는 편리한 시설과 질병으로부터 건강을 지켜주는 첨단 의술과 약품 등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다. 그런데도 현대인은 언제나 불평불만이 끊이지 않는다. <사막의 여행자>를 다시 만나 그들의 단순한 지혜를 배울 일이다!
20230514, 솔물새꽃의 오금동일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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