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만 헷세(Hermann Hesss, 1877~1962, 독일 태생)의 <데미안>은 '나'를 찾아가는 숭고한 순례자의 길에 대한 탐색이다. 곧 에밀 싱클레어의 ‘나'를 찾아가는 이야기다.
나는 이 책을 고2 때 도서관에 앉아서 읽었다. 책을 읽다가 줄을 쳐 암송하고 싶은 구절이 너무 많아 밤늦게 시내 헌책방이 즐비한 곳을 찾아 책을 구입한 적이 있었다. 그 후 헤르만 헷세의 <데미안>은 내가 사랑하는 나와 가장 가까운 친구 중의 한 명이 되었다.
이 소설은 주인공 싱클레어가 '나'를, 진짜 '나'를, 참 '나'(진아眞我, 아트만)를 탐색해 가며 겪는 다양한 체험, 만남을 다룬 일종의 '성장의 이야기'(성장소설)이다. 그 서사의 진행 선상에서 싱클레어는 성장의 단계마다 조력자를 만나 자신의 세계와 타자의 세계에 대한 새로운 자신만의 눈을 갖게 된다.
막스 데미안, 프란초 크로머, 베아트리체, 데미안의 어머니 에바 부인, 신학생 피스토리우스는 싱클레어가 '나'를 찾아가는 성장(변신)의 길에서 만난 소중한 조력자이다. '나'를 찾아가는 숭고한 순례자의 길에서 그가 만난 사람들은 모두 싱클레어가 자신의 굴레를 벗고 새로 변신하여 바깥세상으로 도약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줄탁동기(啐啄同機), 병아리가 부화하여 빛을 보기까지는 안에서 병아리와 밖에서 어미 닭이 동시에 협력하여야 하듯, 한 사람이 알을 깨부수고 새로운 자아로, 새로운 자기의 존재로 부활하기 위해서는 많은 사람을 만나야 한다는 사실이다. 자신의 영적 눈뜸을 도와주는 사람을 시의적절할 때 만나야 한다는 것이다.
이미 타인이 만들어 놓은 관념이나 관행, 통념, 기준에 갇혀 살지 않고 나의 내면의 소리, 뜨거운 생명의 소리, 피의 소리, 영혼의 소리를 듣고 그 소리에 따라 진짜 '나'로 살기 위한 탐색의 과정이 <데미안>의 중심 스토리다. 병아리가 알에서 부화하듯 싱클레어가 내면의 자아를 깨워가는 긴 서상의 여정이다.
<데미안>은 싱클레어가 알의 세계에서 알을 깨부수고 알 밖으로 나와 새가 된 이야기, 나를 가두고 있는 알을 깨고 나와서 오직 나의 신을 찾아 날아간 이야기, 이분법적 틀 안에 갇혀 있던 눈이 열려 자기만의 눈을 갖게 된 싱클레어의 이야기이다.
'나'에게로 향한 자는 고독한 자다. 고독한 자는 자기에게로 나아가는 사람이다. 다른 사람들이 좇는 통념이나 선입견에 매몰되지 않는 자다. '나'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사는 자는 혼자 생각하고, 혼자 산책하고, 혼자 독서하고, 혼자 산을 오르고, 혼자 여행하며 생각하기를 즐기는 자다. 싱클레어는 외로운 자가 아니라 내면의 자아를 향한 뜨거운 열정을 품은 고독한 자다. 그러므로 혼자만의 고뇌의 시간을 누릴 때 최고의 안식을 누리는 자다. 자기를 완성해 가기 위한 탐구의 노력을 아끼지 않는 성실한 자이다.
데미안이나 싱클레어는 과거의 시간 속에 머물러 살지 않는다. 관념의 체계 안에 갇힌 자가 아니다. 새로운 미지의 세계를 향한 열망의 혼불이 꺼지지 않은 사람이다. 싱클레어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내 생명 안의 피의 속삭임을 듣고 고독한 삶 가운데서 ‘나'를 찾아가는 길이었다. 싱클레어는 유복한 가정에서 안락하게 지낼 수 있었으나, 그는 자기 스스로 발견하고 깨달아 구축한 자기 자신의 성을 이루고 싶었던 것이다.
한 인간이 자신을 이루어가는 길에는 우연한 결과가 없다. 내 안에 간절히 원하는 무엇이 있다면 그것은 반드시 이뤄진다. 자신을 ’이쪽‘에서 ’저쪽‘으로 변화시켜 나아가는 자에게는 모험과 투쟁이 있어야 한다. 그 과정을 통과한 자라야 자유의 새가 되고 나비가 되며, 아브락사스, 나의 신이 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작가는 역설하고 있다. 진정한 자아를 찾아가는 길이다.
결국, 이미 만들어진 자기를 깨부수고 내 안의 ‘참 자아’를 찾아가는 모험과 탐색의 이야기인 것이다. 싱클레어가 알에서 알을 깨부수고 알 밖으로 나와 새가 된 이야기. 나를 가두고 있는 관념과 틀을 깨고 새로이 새가 되어 오직 나의 ‘신의 세계’로 옮겨가는 혁명적 이야기. 끊임없는 자기부정을 통해 새로이 자신을 창조해 가는 변화의 이야기. 삶은 이 변화의 흐름 위에 지은 흔들림임을 보여주는 소설이 <데미안>이다.
오늘은 먼 시간 여행을 떠난다. 갓 부화한 노오란 병아리를 포근히 감싸 안아주는 봄햇살 몽실몽실 피어나는 고교 교정에서 난 처음 헤르만 헷세를 알았다. 그 시절로 떠나보는 것이다. '나'라는 존재의 비밀과 그 끝도 없는 미궁으로 나를 이끌어간 헤르만 헷세. '나'에 대하여 희미하게나마 처음으로 눈을 열어준 그를 다시 만나러 가본다. 그를 처음 만났을 때, 그의 안경 낀 얼굴과 깊은 눈매는 단번에 나의 혼을 사로잡았다. 사색에 젖은 잠잠한 얼굴... 그때 나는 헌 책방에서 구입한 <데미안>을 밑줄을 그어가면서 밤을 새워 읽은 후, <싯다르타>, <수레바퀴 아래서>, <황야의 이리> , <동방여행> 등을 이어 읽었다.
그 후 교단을 떠날 때까지 나는 한 해도 거르지 않고 내가 맡은 아이들에게 헤르만 헷세의 문학세계, 정신세계, 사상의 편력을 들려주면서 그의 역저를 읽혔다. <데미안>은 오랫동안 내가 선정한 필독서 안에서 빠진 적이 없었다. '데미안'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뜨겁게 뛴다. 그 뜨거운 가슴으로 오늘도 고교 학창 시절의 '나'를 만나러 간다. 그리고 늘 인생의 새 부활을 모색하며 살아가는 교정에서 만난 수많은 나의 영원한 제자들의 이름과 얼굴을 그려보며 마음으로 불러본다. <데미안>의 ‘싱클레어’와 싱클레어의 영혼의 심장에 불을 밝힌 ‘데미안’과 ‘에바’를 우리 아이들과 만나고 와야겠다.
(솔물새꽃의 오금동일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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