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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생각하기 위한 독서

바슐라르의 <대지 그리고 휴식의 몽상>에서 새 길을 읽다!

by 솔물새꽃 2023. 5.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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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 그리고 휴식의 몽상을 꿈꾸는 시간이 타오르고 있다&#44; 우주의 상상의 문을 여는 물 불 흙 바람의 4원소!
대지 그리고 휴식의 몽상을 꿈꾸는 시간이 타오르고 있다, 우주의 상상의 문을 여는 물 불 흙 바람의 4원소!

가스통 바슐라르의 <대지 그리고 휴식의 몽상>에서 새 길을 읽는다!

아주 간단하게 언급하려 한다. (어려운 철학 이야기 같지만 다음 글의 전개를 위해 아주 간단히 언급하려 한다, 조금 낯설고 어려워도 포기하지 말고 모르면 모르는 대로 알면 아는 대로 그냥 따라 읽어보시라, 아주 작은 느낌만, 아주 미미한 꿈틀거림만 있어도 글을 읽는 보람은 이미 다 누린 것이니까, 독서는 낯선 세계와의 만남이라는 측면을 고려하면 모험 여행이다. 여행에서 보람을 향유하려면 항상 나를 비우고 떠나야 한다. 나를 비워야 다른 세계를 들이는 여백이 생기니까. 비우고 떠나 채워서 돌아오는 일이 여행이다. 독서도 이와 다르지 않다. 처음서부터 끝까지 길을 무찌르지 않고 걸어보는 것처럼 누군가의 글을 읽는 일 역시 모험 여행인 것이다.)

 

서구문명은 합리주의적 사고방식에 의해 이루어졌다. 인간이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는 것만을 진리로 인정한 서구 철학은 물질과 문명을 발전시키는 데는 크게 공헌하였을지 모르나, 그 반대 측면에서 보면 인간 이성 이외의 가치들, 즉 인간의 상상력이나 순수한 감성,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동경 같은 영적인 영역을 비합리적이라고 폄하하며 소홀히 하고 말았다.

 

서구 철학에서 합리주의에 기반한 이원론적 사고방식은 논리적 변증법을 발달시켰는데, 이는 제3, 제4의 다양한 가능성을 완전 배제하는 배타적 원칙을 중시한 결과이다. 이는 양분논리 즉 모든 것을 거짓으로, '이 것' 아니면 '저 것'으로 양분하는 논리인데, 이성과 감정, 즉 진리와 선으로서의 이성과, 거짓과 오류의 원천으로서 감성 이 '두 영역'만을 허용한 것이다. 그 결과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의 영역은 모두 비이성적인 것들, 즉 거짓의 세계이므로 기피해야 한다고 여겨왔다.

 

이와 같은 합리주의 하에서는 자연히 이미지와 상상력과 같은 감성의 영역은 인정받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형식논리로는 정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합리주의가 군림하는 상황에서 가스통 바슐라르의 철학은 상상력의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을 이룩했다고 볼 수 있다. 독일의 니체와 프랑스의 바슐라르가 현대 철학사에서 비교적 높은 위상을 점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지와 상상력의 힘을 인간 활동의 근원적 원천으로까지 끌어올리는데 크게 기여했기 때문이다.

상상력의 철학자이며 문예 비평가인 가스통 바슐라르(Gaston Bachelard, 1884~1962)는 서구 주류 철학의 이성과 합리주의에 과감히 반기를 들고 이미지와 상상력이 인간 정신활동의 근원이라고 주장하였다. 그가 주장했던 4원소설(, , 공기, ) 중 마지막 이라는 원소에 관한 이미지와 상상력의 담론이 1948년 저술한 <대지 그리고 휴식의 몽상>이다.

 

이미지와 상상력 연구의 대가로 이성중심의 서구 사상의 흐름에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이룩한 바슐라르!
이미지와 상상력 연구의 대가로 이성중심의 서구 사상의 흐름에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이룩한 바슐라르.

 

이미지와 상상력 연구의 대가로 이성중심의 서구 사상의 흐름에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이룩한 바슐라르! <대지 그리고 휴식의 몽상>에서 가스통 바슐라르는 모든 원소는 따뜻함과 차가움, 그리고 건조함과 축축함의 네 가지 기본 성질 중 두 가지를 가졌다고 보고, 순수한 상상의 보고寶庫인 자연과 어린아이를 예찬하였는데, 특히 흙과 물과 온갖 생명을 품고 있는 대지가 자연과 인간에 끼치는 놀라운 은총에 대해 역설하였다. 왜냐하면 자연과 대지는 합리주의 사고방식에 따른 선악의 가치 분별이 도저히 불가능한 세계이기 때문이다. 하나의 세계요, 장자가 말한 그 어떤 경계도 구분도 없는 무하유지향無何有之鄕의 세계이다. 상생과 조화와 융합의 세계가 대지와 자연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대지를 접하면 마음이 평안해지고 순수 의지가 되살아난다. 나는 어린아이처럼 그 대지의 감촉으로부터 전해오는 기쁨을 사랑한다."라고 고백했다. 그리고 가스통 바슐라르는 모든 대지의 존재에게 이름을 붙여주고, 모든 이름을 가진 존재에게 나의 생각과 느낌과 인식을 불어넣고, 온갖 생각에 사랑과 추억을 부여해 주는 이런 자연, 대지와 어울리는 활동에는 정말 부드러운 어떤 감촉과 상상력이 있다.”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한편, 바슐라르와 함께 독특한 현대 서양철학의 새 길을 열어간 니체는 인간 정신의 발달 단계를 '낙타 - 사자 -어린아이'의 시기로 구분하고, '어린아이'의 시기를 인간존재의 최고 단계라 여겼다. 어린아이는 어디를 가든 흙을 만지고 맨땅에서 뒹굴며, 물웅덩이를 보면 맘대로 물놀이도 하고 첨벙거리며, 온갖 곤충과 식물에 호기심을 품고 다가가 어울려 잘 논다. 행여 다칠 것과 옷이 젖을 것 따위는 전혀 걱정하지 않는다. 어른들과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어린아이는 교육을 받지도 않았는데 천진스럽게 잘 놀면서 늘 스스로 망각하고, 선악이나 길고 짧음, 이해득실 같은 것을 따지지 않고 매 순간순간 새롭게 느끼며 생명의 고향인 대지와 스스로 잘 어울린다고 하였다. 어린아이는 자연이나 대지의 성정과 가장 닮은 데가 많다는 것이다.

 

천진스럽게 놀면서 늘 스스로 망각하고&#44; 길고 짧음을 따지지 않고 매 순간 새롭게 느끼며 생명의 고향인 대지와 잘 어울리는 어린아이!
천진스럽게 놀면서 늘 스스로 망각하고, 길고 짧음을 따지지 않고 매 순간 새롭게 느끼며 생명의 고향인 대지와 잘 어울리는 어린아이!

 

그렇다, 우리가 왜 두 철학자가 주장한 것처럼 대지와 어린아이를 닮아야 하는지 알 성싶지 않은가, 어른일지라도 어린아이처럼 천진스러운 마음을 소유한 사람은 세속의 욕망을 채우기보다는 흙과 물과 숲에 사는 모든 것들을 사랑하며, 그들의 삶의 터전인 대지(여기서는 대지를 흙, 더 큰 개념인 자연으로 읽으려 한다)의 소리를 들을 줄 안다. 자연과 친밀한 조화를 이루며 사람과 사람의 따스한 관계를 더 즐기며 산다. 대지와 자연의 숲처럼 이웃을 사랑하고 돕는 이타적인 일을 더 자주 하려 한다. (숲과 대지를 보면 바로 이해할 것이다. 대지와 숲은 이웃과 생명을 품어 살리는 힘을 가졌다. ‘만의 왕국 건설을 위하는 인간처럼 숲과 자연의 생태를 결코 헤치지 않는 상생 공존의 길을 간다. 혼자만 잘 되고보려는 이기적인 욕망이 없다.)

 

이 땅의 아이들에게 작금의 교육보다 더 선행해야 할 진정한 교육은 우리 아이들에게 대지의 소리를 듣는 귀를 열어주는 것이다. 대지와 어울려 맘껏 노닐 수 있도록 더 많은 기회를 제공하는 일이다. 우리 아이들이 대지의 풀과 개미와 벌레와 꽃들에게 평등하게 다가가, 그들과 한 인격체로서 서로 공경하는 마음을 갖도록 하는 일이 진정한 교육이다. 대지의 흐름에 저절로 적응하도록 방목放牧하는 일이 이 땅에서 오늘날 행해지고 있는 그 어떤 형태의 교육보다 숭고하고 자연스러운 교육이다. 지금, 당장, 이 땅의 교육 전반에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 일어나지 않으면 이 나라 우리의 숭고한 아이들은 비극의 나락으로 추락하고 말 것이다.

우리는 우리 아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가, 우리는 우리 아이들에게 과연 옳은 것을 가르치고 있는가, 우리는 우리 아이들에게 인간적존재의 본질을 가르친 적이 단 한 번이라도 있는가, 아니면 눈 뜨고 입만 열면 일하는존재만을 예찬하는가,

 

아이들이 대지의 풀과 개미와 벌레와 꽃들에게 평등하게 다가가&#44; 그들과 한 인격체로서 서로 공경하는 마음을 품고 자라기를...!
아이들이 대지의 풀과 개미와 벌레와 꽃들에게 평등하게 다가가, 그들과 한 인격체로서 서로 공경하는 마음을 품고 자라기를...!

 

그리고 틈만 나면 밥상머리에서 돈과 성공과 권력과 아파트와 경쟁과 독선과 이기주의와 물질만을 욕망하는 소유적 존재로서의 왜곡된 삶의 방식만을 강제로 주입하고 있는가, 사랑하는 나의 아이를 망치는 일에 고액의 사교육비를 들여가며 대치동식’ ‘강남식교육에 올인하고 있지나 않은가, 과정은 생략한 채 오직 결과만을 찬양하고나 있지 않은가, 가슴은 없고 머리만 큰 기형의 아이들을 만들어내고 있지는 않은가, 유대감도 연대의식도 생태주의도 모르는 나 홀로족을 만드는 데 몰빵을 지르고 있지 않은가, 진정 돌아볼 일이다, 정말 성찰할 일이다. 사랑하는 나의 아이를 '잘 키우는 일'이 오직 이 한 길뿐이란 말인가?

 

우리는 기술을 다스리는 주인으로서, 생각하는 존재로서, 연대의식을 중시하는 존재로서의 정체성과 자긍심을 회복하는 르네상스적 전환과 실천이 필요한 위기의 시점에 서 있다. 지나온 교단생활을 돌아보면 깊고 깊은 탄식과 부끄럽고 아픈 고백이 내 안에서 폭포수처럼 아우성치는 소리 들린다. 이 땅 이 나라의 숭고한 교육에 관한 한 나는 악한 일을 하는 제도와 무리들과 세상을 향하여 그저 바라보며 침묵으로 일관한 비겁한 자였다.’ 이런 고백이 끊이지 않고 나의 저류를 할퀸다. 지금 대한민국의 교육은 사라진 지 오래다. '교육'이라는 말은 무성하나 진정한 교육은 얼마나 행해지고 있는지 과연 의문이다.

 

국가가 공인한 학교가 사라져 가도 공교육이 죽어가도 그 누구 하나 두려워하지 않는다. 모든 교육의 길이 강남으로 대치동으로 통하는 시대! ‘강남몽대치동을 꿈꾸는 사람들이 와글거리는 이상한 시대! 명문대와 스카이와 일등과 의대와 로스쿨만 무조건 득세하는 혼몽의 시대! 슬프고 서럽고 분노가 치미는 성공 제일주의 시대! 이 시대의 광야를 건너가야 하는 우리는 진정 유목인 나그네 떠돌이 노마드족 여행자 방랑자 하루살이가 맞는가! 너와 나는 나와 너는 나그네, 과연 이 지구별의 여행자가 맞는가? 거대한 숲의 한 그루 나무가 맞는가? 짧고 유한한 인생, 진정 소중한 것이 무엇인가, 진지하게 잠잠히 생각해 볼 일이다!

 

거대한 숲의 한 그루 건강한 나무로 자라주기를 바랄 뿐이다&#44; 주위의 다른 나무도 살리는 나무로 잘 자라주기를...!
거대한 숲의 한 그루 건강한 나무로 자라주기를 바랄 뿐이다, 주위의 다른 나무도 살리는 나무로 잘 자라주기를...!

 

가스통 바슐라르와 니체를 읽으면 그들의 코페르니쿠스적 사고의 혁명이 놀랍다. 그들을 통해 다시 배우는 것은 장자와 노자와 같은 부정의 정신이다.

'우물안 개구리' 식의 좁고 완악한 앎을 질타하며 '대붕'의 '큰 앎'과 '열린 앎'을 주장한 장자, 기존의 편견과 독선에 대한 부정의 정신이 아니고서는 새로운 길, 창조의 새 길을 열 수 없는 까닭이다. 그래서 우리가 아는 것은 모르는 것뿐이라는 말이 진리가 되는 것이다. 우리가 아는 것은 모두 모르는 것일 뿐이다. 혹, 무엇을 아는 것이 있다고 그 작은 앎을 과시하려 한 적이 있는가, 물러설 줄 모르고 자신이 아는 것만 고집하려 한 적도 있는가, '열린 앎'은 자신의 모름을 인정하고 타인의 앎과 세계의 무궁무진함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했다. '큰 앎 大知'은 많이 아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모르는 것을 인정하고 타인의 앎과 세계의 무궁함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했다.

 

나를 이끄는 사고와 지향과 실천의 르네상스적 전환만이 한 시대와 인류를 구원할 것이라는 막연한 몽상만 무지개처럼 떠 있다. 먼 몽상이 대지의 숲에 요원하게 흐를 뿐이다. 오월을 건너가는 신록의 파도 넘실거리는 밤, 어제오늘 연일 봄비가 내린다.

 

영혼과 감정을 가진 <식물의 정신세계>! (tistory.com)

 

(20230529, 솔물새꽃의 오금동일기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