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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은 아이의 ‘자연’을 지켜주는 일!

by 솔물새꽃 2024. 2.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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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이 가지 않는 길을 가야 하는 고독한 결단, 신념, 무모함(?)이 없이는 내 아이를 잘 키워낼 수 없음을 아는 까닭이다.
남이 가지 않는 길을 가야 하는 고독한 결단, 신념, 무모함(?)이 없이는 내 아이를 잘 키워낼 수 없음을 아는 까닭이다!

 
(근 20여 년 전 써본 글을 다시 옮긴다. 이 땅 이 나라에 '교육' 만큼 더 중요한 담론이 어디 있으랴...
예전에 써놓은 글을 정리하다가 이 글을 보니 교육을 평생 고민해온  나로서는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다. 그토록 교육에 관심이 많은 세상 사람들 같지만, 사람들은 정작 이런 글은 잘 읽고 고민하지 않는다. 별 이익이 되지 않는다고 간과한 까닭일까... 나는 그 이유를 쉽게 알 수도 있지만 도저히 그 저류를 흐르는 생각을 믿고 싶지 않다.
 
교육에서 남이 가지 않는 길을 가야 하는 고독한 결단, 신념, 무모함(?)이 없이는 내 아이를 잘 키워낼 수 없음을 아는 까닭이다.)

 

아동기의 교육은 아동이 본래 가지고 있는 착한 마음을 길러주고 지켜주면 된다.
아동기의 교육은 아동이 본래 가지고 있는 착한 마음을 길러주고 지켜주면 된다!

 

교육은 아이의 ‘자연’을 지켜주는 일!

-- <에밀>을 통해 알 수 있는 루소의 교육사상.

 
 

아이들을 가르치는 사람이라면 루소라는 이름을 모르는 이 없을 것이다. 그의 교육사상과 실천의 총체인 『에밀』과 함께 말이다. 대학을 다닐 때 한 번쯤은 읽었거나 읽다가 그만두었을 이 책이 쓰인 시기는 18세기다. 그러니 아주 오래전에 저술한 교육론이다.
 
지금 우리는 21세기를 향한 시점에 서 있다. 그런데 우리가 다시금 '루소'를 생각해야 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어쩌면 루소의 교육사상은 그 이후에 이루어진 모든 교육론과 교육실천의 화두요 원천이다. 그의 교육론에는 문명의 급속한 변화로 고통을 받기 시작한 우리가 직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중요한 교육의 원칙이 담겨 있는 까닭이다.
 
최근의 우리 교육은 새로운 교육을 하자는 목소리가 더없이 높아져 가고 있다. 그것은 당장 입시로부터 자유로운 초등학교에서 크게 일고 있다. 교육과정이 바뀌면서 창의성을 가진 인간, 지정의知情意를 고루 갖춘 전인적 인간, 그리고 세계화와 문명의 흐름에 적응할 수 있는 인간을 기르자며 이구동성으로 떠들고 있다.
 
그러면 어린아이의 진정한 발견자라고 하는 루소는 어린이를 어떻게 보았으며 어린 시절의 교육이 어떠해야 한다고 말하는가. 그는 『에밀』을 통해 15살까지의 어린이를 성장과정에 따라 4단계로 나누어 고유의 교육론을 펼친다. 루소의 교육사상은 특히 초등 교육 기간에 해당하는 12살까지의 교육에 많은 무게를 두고 있다. 그의 교육론과 교육사상을 아동기를 중심으로 살펴보자.
 
루소 교육의 핵심은 '자연을 따르는 교육'이다. 그는 인간을 선한 존재로, 지극히 자연의 일부로 보았다. 따라서 아동기의 교육은 아동이 본래 가지고 있는 착한 마음을 길러주고 지켜주면 된다. 그러면 어떻게 그 본성을 지킬 것인가.
 
이것은 아동의 특징을 충분히 알아야 할 수 있는 일이다. 루소를 아동의 발견자라고 하는 까닭은 바로 어른과 아동이 어떻게 다른가를 밝혀낸 데 있다. 그에 따르며 아동은 이성적인 어른과 달리 감성적인 존재로서 어른과 생각하고 느끼는 방식이 다르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아동이 사물을 배우는 방식에 따라 충분히 감성을 발달시켜야만 이성적인 인간으로 성장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자연의 질서이다.
 
루소가 말한 자연을 따르는 교육은 크게 '소극적 교육'과 '감각 교육'이라는 두 가지의 교육 방법이 있다.
 

아이들은 자연 속에서 사람들 속에서 또래의 아이들 속에서 사물과 문제와 실제 상황을 스스로 부딪치면서 학교에서 배우는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배우고 스스로 터득한다.
아이들은 자연 속에서 사람들 속에서 또래의 아이들 속에서 사물과 문제와 실제 상황을 스스로 부딪치면서 학교에서 배우는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배우고 스스로 터득한다!

 

* '소극적 교육' : 서두르지 않는 교육.

 
소극적인 교육은 달리 말하면 서두르지 않는 교육, 많이 가르치지 않는 교육이다. 방목의 교육이요, 저절로 아이가 찾아서 하는 기다림의 교육이다. 이 말에 따르면 어른은 가르칠 것과 가르치지 말아야 할 것을 가려 낼 줄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 아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치지 않을 것인가.
 
루소는 단호하게 관념적인 모든 것을 가르치지 말라고 주장한다. 관념적인 교육은 감각적인 실제 사물과 생활을 통해 배운 것이 아니다. 이런 관념적 교육은, 아이의 어린 시절은 '이성의 수면기'로 소리, 형상, 감각은 기억하지만, 관념이나 관념적인 것(사유나 사변적인 것)과 관계되는 것들은 거의 기억하는 일이 드물다는 데서 비롯한다.
 
조금 극단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루소는 어린 시절은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고 자유스럽게 내버려 두면 아동 스스로 이성에 눈뜨고 천성이 절로 드러날 것이라고 한다. 이런 믿음을 지키는 일이 쉽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는 아이들이 정말 좋아하고 잘하는 것을 알아차리기도 전에 너무나 많은 것들을 가르쳐서 그 아이가 절로 잘 할 수 있는 것조차 미리 흥미와 소질을 잘라 버리는 ‘조기교육’에 열광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아이들이 배우고 있는 것을 보자. 학교에서 배우는 교과목 수는 수십에 이른다. 게다가 대부분은 의자에 앉아서 책으로 읽고 답하는 것이다. 학교 교육이 많이 변했다고 하지만 근본은 주입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교과서의 벽을 허물지 않는 한 ‘열린교육’이라는 것도 실험이나, 경험을 말로만 많이 강조하여 교과서를 다양하게 가르치는 데에 지나지 않는다. 아이들 스스로 정보를 취사선택하여 재구성하는 기회를 허용하지 않는다. 아이를 기다려주지 않는 어른들의 성급함이 우리 아이의 자발성을 짓누르고 있는 셈이다.
 
이 모든 것은 어른들이 판단하여 정한 지식이다. 아이들이 곧 알게 될 내용인지, 이미 알고 있는지, 정말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인지에 대한 판단은 없다. 이렇게 배우는 것은 모두 자연을 거스르는 일이다. 지나치게 많이 배우는 것은 아이의 머리에 혼란만 불러일으켜 어느 것도 자신 있고 정확하게 깨닫지 못하는 오류를 낳는다.
 
그러면 이 시기에 아동은 어떤 생활을 해야 하는가. 시간을 아끼지 말고 자유롭게, 실컷 노는 것이다. 어른들만이 아이들 교육을 행하는 것이 아니다. 아이들은 자연 속에서 사람들 속에서 또래의 아이들 속에서 사물과 문제와 실제 상황을 스스로 부딪치면서 학교에서 배우는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배우고 스스로 터득한다.
 
사실 어린이의 생활이란 노는 것이며 이것이 아이들의 지극히 단순한 일상이다. 땀 흘려 노는 것을 아동기의 중요한 교육으로 보아야 하는데, 어른들은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어른들은 아동이 노는 대신 시간을 아끼라고 요구하며 그 많은 교과서와 문제집을 들여다보게 하고 학교에서 학원으로 맴돌게 하고 있다.
 
종일 산으로 운동장으로 놀이터로 공원으로 뛰어다니며 소리 지르고 뒹구는 일이 아이들이 할 일이며 아이들의 몸과 마음이 요구하는 일이다. 이것을 하지 못하니까 아이들은 좁은 교실에서 치고받으며 심한 소리를 지르고 공을 굴리고 떨어뜨리고 수다쟁이가 되는 것이다.
 
어른들이 걱정하는 것은 노는 일에 아무런 배움이 없다고 생각하는 데에 있다. 하지만 루소는 잘못된 교육을 받은 아이는 전혀 교육받지 않은 아이보다 훨씬 더 우둔하다고 말한다. 노는 것을 참지 못하는 어른이 좋은 교육을 하리라는 보장은 없다. 왜냐하면 그는 아동을 모르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감성교육’이란 ‘직관直觀의 힘’(경험 판단 추리 등의 사유 작용을 거치지 않고 대상을 직접적으로 파악하는 힘)을 기르는 교육이다.
감성교육이란 직관直觀의 힘(경험 판단 추리 등의 사유 작용을 거치지 않고 대상을 직접적으로 파악하는 힘)을 기르는 교육이다!

 

* '감각교육' : 몸으로 배우는 교육.

 
또 하나 아동기의 교육에서 중요한 것은 감각을 길러주는 일이다. 이 시기는 지식이 아니라 감각과 감성을 발달시키는 일에 모든 힘을 쏟아야 한다. 루소의 뛰어난 점은 ‘감성의 힘’을 올바르게 부각시켰다는 점이다. 그는 어린아이의 모든 지식은 감각 속에 있다고 생각하여 감각을 통해 사물과 자연과 사람을 아는 힘을 길러주고자 했다.
 
어린이는 어른처럼 힘과 이성이 발달하지 못했지만 감각은 어른만큼 훌륭하게 발달해 있다고 한다. 수학자나 과학자를 기르는 조기 영재교육은 성공을 거둔 적이 없지만 춤이나 악기를 일찍부터 배우는 것은 뛰어난 성과를 가져오는 것도 바로 아동기의 이러한 특징 때문이리라.
 
‘감성교육’이란 ‘직관直觀의 힘’(경험 판단 추리 등의 사유 작용을 거치지 않고 대상을 직접적으로 파악하는 힘)을 기르는 교육이다. 사물에 대한 직관은 시각, 청각, 촉각과 같은 감각을 통해 가능하다. 지식을 얻는 진정한 수단은 책이 아니라 최초의 과학 교사인 아이들의 손과 발과 눈이다. 감각이다. 바로 직관력이다.
 
이 감각을 대신하여 책이나 선생의 가르침(주입식 암기)을 사용하게 되면 아이들은 스스로 얻은 이성의 힘으로 사물을 추리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한다. 이 때문에 감각의 촉수를 먼저 깨워주어야 하고 아이들은 자신의 감각에 의해 스스로 자연이나 세상이나 사물을 느끼고 판단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가령, 옛날 사람은 거리와 공간에 대한 감각이 뛰어났다. 땅의 넓이나 크기를 대충 가늠해 보고 몇 평인지 알아낸다. 또한 멀리서도 거리나 길이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해 낸다. 이들은 삶 속에서 오랜 시간에 걸쳐 이 같은 공간 감각을 익힌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아이들은 책상에 앉아 교과서에서 이런 것들을 배운다. 무게와 넓이, 길이의 단위를 배우고 환산하는 법을 배운다. 생활 속에서 쓸모가 생겨 배우는 것이 아니라 나중에 쓸모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암기하고 미리 배우는 것이다. 이 때문에 운동장에서 집까지의 길이가 자기 걸음으로 얼마나 되는지 감각적으로 느껴보고 셈하는 일은 거의 없다.
 
루소는 넓이나 거리 같은 것들은 모두 직접 발로 걸어보고 하면서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도 자연의 척도인 자신의 팔과 다리, 걸음걸이를 가지고 말이다. 감각 교육은 이렇게 손으로 사물을 만져보고 재보고, 질감을 느껴보고 발로 걸어보면서 하는 교육이다. 이렇게 해야만 사물과 자연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지고 이치를 몸으로 느끼며 그 인상이나 느낌이 아동의 머리에 저절로 들어온다는 것이다. 이때 바로 직관의 힘이 길러진다.
 
루소에 따르면 대상에 대한 관찰 없이 기억으로만 그림을 그리는 일도 바람직하지 않다. 그는 자연과 실물을 유일한 그림 그리기의 교사로 삼을 것을 주장한다. 집을 그리려면 집을 보고 그려야 하고, 사람을 그리려면 석고가 아닌 움직이는 사람을 보고 그려야 한다고 역설한다. 이때라야 물체를 관찰하는 버릇이 길러진다. 또 균형에 대한 감각과 자연에 대한 아름다움을 갖게 된다.
 
흔히 아이들은 미술시간에 책상에 앉아서 그림을 그린다. 나무 하나 집 하나를 충분히 살피고 그리는 과정이 없이 대충 머리에 든 기억으로 언제든지 그리고 싶을 때 그린다. 이런 습관이 실제 사물을 보면서도 정확하게 보려 들지 않는 버릇을 암암리 키운다. 감각교육이 상상력을 부정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상상도 역시 현실에 튼튼하게 뿌리를 내리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 사물을 관찰하는 힘이  없고서는 상상하는 능력도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 시기의 아이들은 추상적인 말로 하는 교훈이나 설교를 이해하는 힘이 부족하다. 그러니 따분한 잔소리나 설교가 얼마나 아이들에게 불필요한 것인가 알아야 한다. 훈화와 교훈은 경험으로 주어져야 한다. 착한 일을 하라는 것조차 재촉해서는 안 된다. 선善이란 전혀 이성적인 행위이기 때문이다.
 

양심이나 선행은 가르쳐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충분한 감성교육을 받으면 아이들의 마음속에 양심이 일고 이것이 발전하여 도덕적인 이성을 갖춘 인간에 저절로 도달한다.
양심이나 선행은 가르쳐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충분한 감성교육을 받으면 아이들의 마음속에 양심이 일고 이것이 발전하여 도덕적인 이성을 갖춘 인간에 저절로 도달한다!

 

* 먼저 가르치지 않을 것부터 결정하자.

 
루소는 어린 시절의 도덕적 가르침이란 남에게 해를 입히지 말라는 것 하나면 족하다고 한다. 인간의 능력 중에서 이성이란 인간의 다른 모든 능력의 총체적 합성물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가장 발달이 느리고 늦게 이루어진다.
 
양심이나 선행은 가르쳐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충분한 감성교육을 받으면 아이들의 마음속에 양심이 일고 이것이 발전하여 도덕적인 이성을 갖춘 인간에 저절로 도달한다. 어떤 사실을 추리하는 힘은 구체적인 갖가지 경험에서 생기는 덕목인 까닭이다.
 
그러니 논리적 사고나 창의력을 기르기 위해 아이들에게 행하는 갖가지 프로그램이 모래 위에 지은 집이 아닐 수 없다. 지금은 그럴듯해 보이지만 그것이 아이의 내면에 스미지 않고 반사되어 버린다. 창의력은 생각하는 힘인데, 루소에 따르면 이 힘은, 이성의 힘이 증가하면서 서서히 커진다.
 
루소는 불확실한 장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시키고, 장래의 행복이라는 것을 마련해 준답시고 아이를 불행하게 만드는 일을 가장 우려한다. 그것은 비인간적인 교육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그렇다면 루소가 한 말이 지금 시대에는 전혀 해당하지 않는 것일까!
 
우리는 늘 어떻게,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만 생각해 왔다. 그리고 사람이 하는 교육만을 전부라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루소는 자연과 사물의 관점에 서서 가르치라고 말한다. 아동에게 보여줄 것과 숨겨야 할 것을 구별해서 말이다.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할 것과 가르치지 않아야 할 것을 구별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루소는 불확실한 장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시키고, 장래의 행복이라는 것을 마련해 준답시고 아이를 불행하게 만드는 일을 가장 우려한다.
루소는 불확실한 장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시키고, 장래의 행복이라는 것을 마련해 준답시고 아이를 불행하게 만드는 일을 가장 우려한다!

 
루소의 교육은 방목放牧이다. 아이를 잘 키우는 길은 인내하는 방목의 기다림이다. 지금 우리가 할 일은 가르칠 게 너무 많아 비명을 지르기보다는 가르치지 않을 것을 정하여 인내하고 기다리는 일이 아닐까. 어린아이들이 그들 스스로 할 수 있도록, 자신의 힘으로 저절로 할 수 있도록 기다려주는 방목의 기다림이 필요하다.
 
그리고 우리 아이들이 학원 밖으로, 교실 밖으로 걸어 나와 온몸으로 하는 감각교육의 기회를 최대한 많이 허용해야 하지 않을까.  (2008/05/05, 교정 골방에서)
 
20240213, 오금동 우거에서 솔물새꽃(김삼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