書如其人서여기인!
이 귀한 말을 다시 깨우쳐 주어 정말 고맙다.
(서여기인書如其人, 사람은 그가 남긴 글로 다시 세상과 만난다. 글은 그 글을 지은 사람의 얼이요 영혼의 문빗장이다. 그리하여 글은 넋이 흐르는 마음의 무늬요 물결이라 비유해도 무방할 것이다. 다시 마음의 거울이라고 하면 어떨까, 사람은 누구나 그가 남긴 글로 이 세상을 다시 산다. 그리고 수많은 후세의 사람과 다시 만난다.
자신의 존재와 삶과 자연과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은 글을 쓴다. 글로써 길고 긴 생生을 다시 지속하며 세계와 대화한다. 그러므로 글을 쓰는 일은 자신의 존재와 이 세상 살아있는 모든 것들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다. 따라서 한 조각의 글이나 한 톨의 글씨라도 소홀함이 없어야 함은 글이나 글씨에는 한 존재의 얼과 혼이, 그리고 한 생애의 모든 것이 농밀하게 스며있는 까닭이다. 때론 눈물일 수도 아픔일 수도 절규일 수도 있고, 삶의 희열이요 소망일 수도 있는 한 인간의 숨결이 그 안에 흐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분망하게 살다 보니 판소리와 아주 멀어졌었는데,
오지윤 명창의 '심청가'를 통해 그리운 옛 소리의 길을
다시 더듬어 걸어볼 수 있었다.
수학했던 학교에서 판소리를 공부할 때이니까,
근 40여 년 전에 공연장에서 소리를 듣고 난 후 처음인 셈이다.
나는 오늘 비상하는 소리의 혼魂을 보았다.
신들린 듯 꿈틀 하며 오랜 침묵에서 깨어난 내 안의 '심청'이라는 거인을 만났다.
죽어야 다시 사는 갈앙渴仰의 소리 혼이 긴 잠에서 비상하는 것을 보았다.
잔잔하게 뜨겁게 서럽게 어깨 들썩이며 눈물 훔치며 ‘얼씨구’ 추임하며 소리의 매혹에 스며들고 말았다. 관객의 넋을 빼내 소리판에 몰입하게 한 소리꾼(가객, 창객)의 열연 열창의 신명 나는 춤판은 '나'를 찢어 몰입시키고 말았다.
다시 그리운 옛길을 더듬어 반추할 수 있었던 날! 사는 날 동안 잊을 수 없는 추억을 이 가을에 품고 살게 되었다. 큰 선물을 받은 것이다. 정말 오지윤 명창께 고맙다는 말씀을 드려야 할 것 같다.
나의 가슴에 아직도 마르지 않은 오래된 소리의 빛과 한恨과 서러움과 신명과 인생살이의 묘한 색조와 무늬가 창자의 율동과 소리의 선율에 흐르는 것을 보았던 것이다. 혼신의 힘을 다 받쳐 열창하는 가녀린 소리꾼의 절창...! 작은 동박새 한 마리의 몸집에서 거대한 숲을 흔드는 청아한 소리의 울림이 터져나오듯이 폭포수처럼 전율하는 소리의 매혹...!
진양조에서 중모리 자진모리 휘모리까지 오지윤 명창의 다양한 음색의 울림과 박천음 고수의 추임새, 아담한 국악당의 분위기, 수준 높은 관객의 호응이 절묘한 조화를 이룬 정말 멋진 우리 소리의 향연이었다.
씨줄과 날줄로 촘촘히 엮어 감기는 베틀 속 무명 모시 각목처럼 몸으로 맘으로 눈물로 그리움으로 기다림으로 흐르며 교차하는 소리의 알 수 없는 묘연한 길을 가을 풀벌레소리 자욱한 돈화문국악당 뜰에서 보았던 것이다. 나에게는 초가을밤 놀라운 축복이 아닐 수 없었다.
우리의 옛 판소리계 고전소설을 공부할 때, 남산 국립극장에서 안숙선 명창의 춘향가 완창을 관람한 적이 있었는데, 그 아득한 날들이 눈에 선하다. 아마 이맘때쯤이 아니었을까, 싶다. 풀벌레 우는 소리 흥건한 초가을 밤이었을 것인데, 으슥한 남산 길을 돌아 내려오는 길에 명창의 가슴에서 전율하는 소리의 여음이 밤하늘로 승천하는 선학의 춤사위처럼 길게 오래 흐르는 것을 보았던 것이다. 소리의 울림이 내 안에서 바다처럼 밤새 들썩였던 날이었다.
(지금도, 그 시절 안숙선 명창의 예닐곱 살 된 어린 따님이 객석 맨 앞 의자에서 재롱을 피우며 졸다 울다 보채는 것을 본 기억이 늘 우수처럼 안개 풀풀 날리곤 한다. 근 40여 년이 다 되어가는데도, 내 맘을 여음처럼 잔잔히 흐른다. 그 따님도 지금은 장성하여 소리의 길을 흐르고 있을까...)
나는 판소리를 잘 모른다.
다만 남녘이 나의 태를 묻고 나의 맘과 몸의 틀이 만들어진 텃밭인지라, 남도 서편제 육자배기 타령 무가 민요 노동요 울 할머니의 눈물 젖은 소리 울아버지의 육자배기나 타령조 같은 선율은 늘 나의 가슴을 흐르며 우주와 자연과 하늘의 익숙한 율조를 느끼기에 충분한 감각이 되어 주었다.
계절이 바뀌고 해와 달이 흐르고 구불구불한 강과 길이 이어지는 형상을 볼라치면 늘 나의 의식의 배면에는 이 남도 소리의 울림과 장면들이 노을처럼 나의 맘에 온통 붉게 타오를 때가 종종 있었던 것이다.
그 후
이청준 한승원 이야기꾼의 남도의 빛과 남도 소리의 길을 적은 글들을 읽을 수 있게 되었고, 조정래의 유장한 서사의 강을 배회하며 남도의 자연과 정한과 하늘과 서정의 길을 따라 걸어야만 하는 방랑자가 되고 말았다.
득음得音 득공得功 시혼詩魂 예술혼 신명 장인의 끼 촉기 남도의 풍류 맛과 멋 개미... 풀고 맺고 다시 풀고 풀며 흐르는 포기할 수 없는 생애의 강, 참 인생살이의 길, 차면 비우고 비우면 다시 채우며, 오르며 내리며 풀고 맺고 다시 풀며 살아가는 길이 남도 풍류와 인생살이의 길일진대, 소리는 그 길의 그림자요, 그 길에서 비상하는 선학이요, 그 길을 적시는 눈물 젖은 도랑물인 것이다.
이 길이 얼마나 지난至難한 기다림이요 목마른 열망이요,
모질고 끈질긴 인내의 길인가를 더 깊게 생생히 공감하기 위해
나는 틈날 때마다 탐진강도 섬진강도 영산강도 진도도 보성도 남원도 쉬엄쉬엄 걸으려 한다.
내 안에서 강물 소리, 그 그윽한 울음이 들릴 때까지...
남도 산하를 거닐 때마다, 깊고 그윽한 지리산과 설악산과 한라산 산문에 들 때마다,
남도의 천관산 월출 주작 덕룡산, 두륜산 첨찰산을 거닐 때마다,
그 길에 들어서면 늘 세상에서 보이지 않는 것들이
더 훤히 잘 보일 때가 있음을 그 길은 항상 깨우쳐주었다.
바람의 소리 들풀과 들꽃의 소리 금강송의 솔향기 강의 소리 산의 숨결 산안개 흐르는 소리 떠 흐르는 흰구름의 소리 달이 가는 달빛 예리성까지 읽고 보고 듣고 느끼는 남도 산하의 길을 느림느림 그냥저냥 걸어보려 한다. 그 길이 한결같이 소리 혼의 길이요 글의 길이요 시혼의 길이요 자연의 길이요 사람의 길인 것을 굳게 믿는 까닭이다.
늘 오지윤 명창의 소리 혼이 꽃처럼 피어나기를,
이 땅에 우리 소리(판소리)의 강이 너울너울 나비 활활 구름 훨훨 흐르기를
뜨겁게 응원하는 마음이다!
20230912, 오금동 우거에서 솔물새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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