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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기행

강진, 모란은 피고 탐진강은 흐르고

by 솔물새꽃 2023. 5.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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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즉 나의 봄을 기둘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즉 나의 봄을 기둘리고 있을 테요!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 김 영 랑

 

 

내 마음의 어딘 듯 한편에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돋쳐 오르는 아침 날 빛이 빤질한
     은결을 도도네
 
가슴엔 듯 눈엔 듯 또 핏줄엔 듯
마음이 도른도른 숨어 있는 곳
 
내 마음의 어딘 듯 한편에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은결 : 은빛 물결, 윤슬
 
순수문학동인지 <시문학>(1930)에서 인용함.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44;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44; 삼백 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 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

오월이면 나는 나도 모르게 김윤식(1903~1950) 영랑의 시를 암송한다.

나의 혈류를 흐르는 영랑의 노래,

영랑의 시는 내 안에 살아서

오월이면 봄으로 모란으로 다시 피어나고 있는 까닭이다.

영랑의 시심이 내 안에 지필 때면 금세 나는 오간데없고,

나는 영랑이 되어 그의 촉기를 느끼며 영랑의 시혼詩魂 흐르는 북산 우두봉의 하늘을 날아오르는 나비가 되어 있는 것이다.

 

나는 오월의 봄이 오면 돌담에 어리는 햇살을 한 아름 품에 들이며 영랑 생가의 토방마루에 앉아본다. 동백이 뚝뚝 떨어져 버린 장독대 양지바른 곳, 모란의 애잔한 꽃망울을 기다린다. 아름드리 은행나무 그늘아래 앉아 울타리 대나무 숲을 흔들며 넘어오는 보은산 우두봉 꾀꼬리 소리에 느긋이 잠겨보기도 한다. 지금은 다 말라버렸지만 사랑채 모퉁이 샘물에 비친 아득한 봄의 하늘을 우두커니 그려보기도 한다.
 
나는 오월이면 보은산 우두봉에 올라 내 마음 한편에 끝없이 흐르는 탐진강을 따라 설레는 마음으로 걷는다. 봄날 아침이면 나의 상념은 아청鴉靑의 하늘을 우러르며 보은산 자락에 닿아 있거나, 모란공원 뒤쪽 북산 능선을 오르고 있거나, 우두봉을 지나 금곡사 가는 비파산琵琶山 산도화 꽃그늘로 흐르고 있다. 나도 모르게 마음은 남도의 산하를 떠돈다. 탐진강 포구 남포 바다를 바라보면 바다의 품에 안긴 올망졸망 작은 섬들이 아늑한 봄바다의 평화를 선물해 준다. 강과 바다와 하늘이 경계없이 하나 되어 나를 향해 가슴을 열어준다!

 

보은산 우두봉에 올라 내 마음 한편에 끝없이 흐르는 강을 기다린다!
보은산 우두봉에 올라 내 마음 한편에 끝없이 흐르는 강을 기다린다!
바다의 품에 안긴 산인지 산의 가슴에 잠든 바다인지 구분할 수 없는 남녘의 낮고 낮은 산하&#44; 산과 바다와 하늘!!
바다의 품에 안긴 산인지 산의 가슴에 잠든 바다인지 구분할 수 없는 남녘의 낮고 낮은 평등한 산하, 산과 바다와 하늘의 키는 높고 낮음이 없다!
먼 길 흘러온 탐진강과 구강포가 만나 하나의 바다를 이루는 남포바다&#44; 이렇게 강은 한 생애의 길을 마친다!
먼 길 흘러온 탐진강과 구강포가 만나 바다를 이루는 남포바다, 이렇게 강은 한 생애의 길을 마치고 바다는 다시 새 날을 향한다!

강진은 나의 고향이다. 솟을 대문을 열면 탐진강 물소리 귓전에 들리는 장흥 평장에 태를 묻은 나는 6살 여린 봄의 움이 돋아날 무렵 강진으로 이사와 이곳에서 내 영혼과 육신의 키를 다 키워냈다. 나의 지향과 상념의 배광이 되어 준 고향, 강진의 시공時空, 아청鴉靑의 서기산 하늘, 앞산 한치재 그림자 아래서 나는 자랐다.

이것을 우리는 한 존재의 숙명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나의 영혼의 빛과 소리와 향기와 언어는 강진의 바람과 황토밭과 뻘밭의 간간한 갯냄새와 왕버드나무의 그늘, 동백과 모란의 그늘, 감꽃 핀 장독대의 그늘, 자운영 가르마 논두렁 길의 그늘, 탐진강 삐비꽃 강둑의 그늘, 이 많은 강진의 그늘아래서 나의 혼은 자라온 까닭이다. 그러므로 나의 빛깔과 무늬와 향기와 소리의 원천은 강진이다. 강진은 나의 언어요 나의 노래요 나의 눈물이요 나의 시의 영토다.
 
북산 우두봉에 올라 탐진강과 바다가 만나는 포구를 바라보고 있으면 금세 눈부신 아침 봄 햇살, 눈이 시리게 부서지는 남포 바다의 반짝이는 은빛 윤슬, 아스라이 아청鴉靑의 탐진강 하늘은 나의 온 맘에 가득 떠 흐르고, 강인지 산인지 바다인지 하늘인지 모를 경계도 구분도 나뉨도 차별도 없는 평등한 무등無等의 세상을 나는 만나 노닐고 있는 것이다.
 
오월의 봄이 와서 이 천혜의 그윽한 순결을 가슴에 품어 보는 일은 큰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유년의 토양과 들과 바다와 강과 산천의 환경이 한 영혼을 살찌우고 육신의 키를 키워낸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먹고 마시고 호흡하며 사는 길이 결국 한 개인의 생애가 흐르는 강이 된다고 할 수 있으리라. 흙냄새 물냄새 꽃냄새 새들의 소리와 눈으로 바라본 하늘의 빛깔 등 우리의 감관기관을 통해 감촉한 오감의 맛과 느낌들이 한 개인의 멋과 풍류와 성정을 이룬다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높고 낮음이 없고 나뉨도 차별도 없는 평평하고 아늑한 지평&#44; 왕버드나무의 그늘에서 나는 자랐다!
높고 낮음이 없고 나뉨도 차별도 없는 평평하고 아늑한 지평, 왕버드나무의 그늘에서 나는 자랐다!

낮고 낮은 남도 강진의 영토는 들과 강과 바다의 키가 겨우 한 뼘에도 미치지 않는다. 높고 낮음이 없고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평평하고 아늑한 지평이다.

돋아 오르는 아침 햇살이 잔잔한 물결 위에 은비늘처럼 반짝이는 융숭한 인정이 흐르는 강과 바다의 아침이다. 해거름이면 잔잔한 강가에 나가 하루의 신음과 서러움과 생애의 잔해를 다 내버리고 돌아와도 좋을 은은한 별빛 달빛 내리는 논두렁 가르마 길이다. 갈대의 바람이 흐르는지 수줍은 순정이 흐르는지 동백의 눈물이 흐르는지 소쩍새가 우는지 훈훈한 황토의 가슴이 흐르는지 간간한 뻘밭의 갯냄새가 흐르는지 모를 물빛 순후한 가슴이 흐르는 길이 강진의 길이다.
 
만덕산과 보은산의 품에 깃든 강진, 멀리 마량만과 가우도를 건너와 남포 앞바다 갈대밭에서 긴 겨울을 이겨낸 강진의 봄, 오월 봄의 하늘 아래 은은한 가슴들이 모여 사는 강진! 짱뚱어 뻘게 뱁새 고니 청보리 장어 은어 토하 동백꽃 모란이 도른도른 모여 태평한 봄을 기다리며 사는 모란과 동백의 마당, 강진! 오월과 봄의 모꼬지 강진!
 
젖은 옷고름 풀어 날리며 바다의 품에 안기는 탐진강을, 구불구불 느림느림 흐르는 강진만의 남파랑 길을, 청보리 파랑파랑 물결치는 구강포와 만덕산 백련사 풍경소리의 길을, 다산초당 가는 길에 뚝뚝 떨어진 동백꽃망울의 길을 건너온 5월, 오월의 봄이 오면 기다림과 서러움으로 피어나는 꽃, 모란을 기다리는 강진은 봄의 낙원이요 봄과 작별하는 서러움의 고장이다. 돌담에 속삭이는 봄 햇살이랑 풀 섶 아래 웃음 짓는 샘물이랑 한 세상 살다가는 강진의 가슴들, 그 가슴들 가운데 핀 순결한 꽃!
 
강진 보은산 자락 모란공원은 모란이 반짝이는 별유천지다, 지상의 별밭이다. 긴 설렘과 짧은 보람이 교차하는 봄의 길목에 모란은 기쁨이요, 모란은 서러운 눈물이다. 기다리는 봄도 눈물이요, 배웅하는 봄도 눈물의 강이다. 봄을 기다리며 길고 모진 세월의 강을 건너온 강진의 가슴들, 황토의 뜨거운 가슴들, 뻘밭의 간간한 눈물을 품은 만민의 인정들, 황토밭과 뻘밭과 물빛 순결한 눈물 속에 흘러온 은은한 멋과 맛, 남도 풍류의 원류는 탐진강과 남포 바다와 황토와 뻘밭, 은은하고 끈질긴 인정의 가슴들이 아니면 그 어디랴,
 

저 솔밭등 가르마 길을 걸으면 아버지의 녹슨 세월도 살아서 다시 봄으로 돌아온다!
저 솔밭등 가르마 길을 걸으면 아버지의 녹슨 세월도 살아서 다시 봄으로 돌아온다!

남도 풍취 남도 풍류 남도 소리 남도 선풍은

뜨거운 가슴들이 눈물로 키워낸 강진의 빛나는 유산이다.

강진의 창조 신화다.

 

긴 세월 ‘봄’을 기다리고 ‘모란’을 꽃피우며 익히고 삭혀온 간간한 눈물의 가슴이 남도 정신, 남도 맛과 멋의 모성이다. 강진의 멋과 맛의 텃밭이다. 은은한 동백의 길이요 대나무 뿌리의 끈기가 남도 강진의 맛과 멋의 태동이라면 가슴의 눈물은 강진의 멋과 맛을 키운 모성이다. 이 흙의 가슴과 눈물의 길이 아니고서야 어찌 강진의 인정이 흐르랴, 강진의 혼백이 동백으로 모란으로 꽃 피어나랴, 어찌 남도 강진의 멋과 맛이 곰삭으랴,
 
오월, 강진의 봄은 분명 모란의 계절이다. 삼월, 여린 봄이 동백의 길이라면 장성한 오월은 틀림없이 만발한 모란의 길이다. 머물러 있는 세월이 어디 있으랴, 우리를 기다려주는 봄이 또 어디 있으랴, 덧없이 흐르는 봄의 길. 지금, 우리가 그토록 기다렸던 봄이 가고 있다, 모란의 오월이 뚝뚝 떨어지고 있다, 오월이 가고 말면 우리는 봄을 여읜 설움과 허허한 외로움 가운데 잠기고 말 것이다.
 
봄날이면 보은산에 올라 구강포를 바라보자. 잔잔한 바다 위에 올망졸망한 섬들을 보며 외로운 존재의 길을 걸어보자. 살아온 날들의 애수와 회한도 다 씻어내보자. 모란이 피듯이 아침이 피어나듯이 내 안에 피어나는 소망을 꼬옥 품어보자. 남포 바다의 섬들은 분명 바다에 떠오른 모란이다. 내 마음이 호젓할 때 불러보는 내 안의 섬이다. 뻘밭 위로 다시 살아오는 아침의 윤슬은 하늘이 내린 축복이다!
 

은비늘처럼 반짝이는 윤슬&#44; 잿빛 뻘밭&#44; 해무와 만덕산의 그림자 그늘에서 남도 강진의 맛은 익어갔으리라!
은비늘처럼 반짝이는 윤슬, 잿빛 뻘밭, 해무와 만덕산의 그림자 그늘에서 남도 강진의 맛은 익어갔으리라!

 

멀리 장흥의 천관산과 약산 고금도와 남파랑 쪽빛 바닷길은 스멀스멀 아침 해무 피어오르고,

북산의 나지막한 능선을 따라 영랑모란공원으로 향하는 길에,

영랑의 ‘돌담에 소색이는 햇발’을 암송하며 발길을 잠시 멈춘다.

오월의 봄 햇살이 생수처럼 내 안을 푸르게 흐르는 탓이다.

영랑의 투명한 봄의 촉기(시혼)가 내게 흘러들어온 탓일까,
 
고향 강진의 밝고 맑은, 보드레한 오월의 눈빛을 다시 그려본다.
 

그의 시는 내 안에 살아 오월이면 봄으로 모란으로 다시 피어나고 있는 까닭이다.
영랑의 시는 암송할 때마다 내 안에 오월로 살아 온다. 봄으로 모란으로 다시 피어난다. 인생은 덧없으나 시의 길은 긴 까닭이다!

 

오-매 단풍 들것네&#44; 어서 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
오-매 단풍 들것네, 어서 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

 

내 마음 고요히 고흔 봄길 우에 흐르고 싶다...!
내 마음 고요히 고흔 봄길 우에 살포시 흐르고 싶다...!

 

‘돌담에 소색이는 햇발’

 - 김 영 랑

 

 

돌담에 소색이는 햇발같이
 
풀 아래 웃음짓는 샘물같이
 
내 마음 고요히 고운 봄길 위에
 
오늘 하로 하늘을 우러르고 싶다.
 
 
새악시 볼에 떠오는 부끄럼같이
 
시詩의 가슴을 살프시 젖는 물결같이
 
보드레한 에메랄드 얇게 흐르는
 
실비단 하늘을 바라보고 싶다.

 

 
20230516, 솔물새꽃의 남도일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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