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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생각하기 위한 독서

주디스 콜 <떡갈나무 바라보기>, '움벨트'를 생각하다!

by 솔물새꽃 2023. 2.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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떡갈나무 바라보기&#44; 를 다 읽은 어떤 학생이 이 그림을 나에게 선물해 주었다. 잊을 수 없는 추억...
떡갈나무 바라보기, 를 다 읽은 어떤 학생이 이 그림을 나에게 선물해 주었다. 잊을 수 없는 추억...

주디스 콜의 <떡갈나무 바라보기> 읽고, '움벨트'와 장자의 '제물론'을 생각하다! "다른 세계의 진실을 만나려면 잠시 자신의 세계를 잊어야 한다." 내가 <떡갈나무 바라보기, 동물들의 눈으로 본 세상>을 읽고 난 후 깨달은 잠언이다. ‘동물들의 눈으로 본 세상’이라는 부제가 붙은 <떡갈나무 바라보기>는 인간의 세계에 대한 시선이 얼마나 편협하고 독선적인가를 일깨워 준다.

 

흔히 사람들은, 세계에 대한 보편적인 지식을 제공하는 것이 과학이라고 믿는다. 자연 현상에 대한 면밀한 관찰과 실험을 통해 자료를 수집하고, 이 자료를 포괄할 수 있는 가설을 설정하여 예측과 검증을 거쳐 객관적 지식으로서의 정당성을 부여하는 과정에서 과학적 진리는 탄생한다고 말할 수 있다.

 

지금까지 과학은 우리의 실제 생활과 관련을 맺으면서 놀라운 가치를 창조하였고, 인간의 필요와 탐욕을 채워주는 가장 직접적인 수단으로써 그 책무를 묵묵히 수행하고 있다. ‘눈에 보이는 것만을 가치 있게 평가하는 서구 유럽식 사상가가 아닐지라도 과학의 결과인 기계문명이 제공하는 놀라운 생산력과 편의성 앞에서는 입을 다물고 마는 것이 현실이 되고 말았다.

 

특히, 20세기 들어오면서 이루어진 과학기술의 진보는 과거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들을 가능하게 하고 있다. 삶의 방식과 사고의 유형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왔고, 시간과 공간에 대한 고전적 통념마저 수정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과거 인간이 지녔던 가치 기준이 달라졌고, 경제와 정치, 사회, 문화, 지식, 정보 등 삶의 총체적 요인들이 전광석화처럼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과학은 정보통신 기술의 혁명적 변화를 이루어내어 사생활 침해와 정보 불평등이라는 새로운 문제를 불러일으키고 있으며, 의료기술은 보건의료의 불평등을 야기하고 있고, 생명공학은 생명윤리의 문제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뿐만 아니라, 과학기술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려는 인간 중심적인 이기심은 자연과의 조화로운 상생의 질서를 파괴하여 전 지구적 환경파괴와 기후변화에 따른 재앙 앞에서 인류를 불안에 떨게 하고 있다.

 

이런 상황은 인류가 과학에 대해 갖고 있는 시각의 수정을 불가피하게 하고 있고, 과학에 대한 사회적 통제가 필요함을 시사한다고 볼 수 있다. 과학은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지식체계라는 맹신적인 우리의 태도에 대한 성찰이 필요함을 담고 있다. 몇 해 전에 우리는 황우석 사태를 경험한 바 있듯이 과학기술에 마냥 열광할 것이 아니라 냉정하고 차분하게 과학에 대한 성찰과 과학에 대한 인간의 빗나간 고정관념을 반성할 계기를 맞게 된 것이다.

 

인간의 앎은 때때로 다른 세계를 배척하는 오만과 독선의 시발점이 되기도 한다!
인간의 앎은 때때로 다른 세계를 배척하는 오만과 독선의 시발점이 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문명사에서 과학은 모든 인류에게 한사코 긍정적으로만 존재하였을까? 과학은 인간에게 이성적인 사유의 위대함을 깨우쳐 주고 인간의 필요와 궁핍을 해결해 주는 역할만을 충실하게 하였을까? 과학은 세계에 대한 인간의 지적 호기심을 채워주고 우주에 대한 올바른 인식에 도달할 수 있도록 공정하고 균등한 역할을 다하였을까? 과학이라는 폭력적인 침입자때문에 우리 인간은 자연과 우주를 인간 중심적으로 오만하게 해석하고, 심지어는 이분법적으로 편을 가르는 일에 앞장서서 인간의 주관적 시각으로만 자연을 바라보지는 않았는가? 이런 숱한 과학에 대한 회의와 성찰을 가능하게 하는 질문을 던지면서, 과학이 오늘날 놀라운 을 가진다고 할지라도(절대적 신과 같은 존재로 인정될지라도) 그것이 과연 객관적인 믿음의 체계인가에 대해서는 한 번은 캐물어 보고 넘어가야 한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동물들의 눈으로 본 세상이라는 부제가 붙은 <떡갈나무 바라보기>(주디스 콜, 허버트 콜 공저/ 이승숙 옮김/ 사계절)는 인간의 세계에 대한 시선이 얼마나 편협하고 독선적인가를 풍부한 사례를 통해 일깨워 준다. 그리고 과학적 진리는 세계에 대한 가장 보편적 진리를 대변한다는 기존의 과학적 믿음에 의문을 갖게 하는 책이다. 또한 세계(우주)에 대한 인간의 좁은 편견과 주관적인 해석이 전 우주적 생명 종의 질서를 얼마나 많이 왜곡하고 파괴하였는가를 겸허히 돌아보게 하는 책이다.

 

이 책은 모든 생명체에 의해 동시에 경험되는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명제를 내세운다. 저자는 이 책을 움벨트umwelt’라는 개념을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야곱 폰 웩스쿨이『동물과『 인간 세계로의 산책에서 처음으로 사용한 이 용어는 동물이 경험하는 주변의 생물 세계를 나타내기 위한 의도로 원래 만들어졌다. 야곱 폰 웩스쿨은 그의 또 다른 저서 이론 생물학에서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세계에는 단 하나의 공간과 시간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 다양한 주체에 따라 수많은 공간과 시간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 개개의 주체는 자기 나름의 공간과 시간을 갖는 고유한 환경에 속해 있다”라고 말한 바 있다.

 

이런 성찰적 전제하에서 사용하기 시작한 움벨트라는 이 독일어는, 모든 동물이 공유하는 경험이 아니라 개개의 동물에게 특별한 유기적 경험을 일컫는다. 야곱 폰 웩스쿨에 따르면 개미와 벌은 동일한 환경을 공유하지만, 서로 다른 움벨트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벌과 개미는 자연환경을 각기 다른 방식으로 인식하고 해석하며 반응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감각기능과 크기가 다른 동물의 움벨트를 제대로 이해하지 않고 인간의 생각과 관점으로 생물의 삶을 설명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색맹인 사람이 보는 세상과 정상인이 보는 세계는 같을 수가 없다. 이때 정상인과 색맹인은 다른 움벨트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런 논리를 발전시키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생명체만큼의 움벨트가 존재한다고도 말할 수가 있다. 따라서, 인간이 가지는 움벨트만이 절대적인 세계가 아니라는 것이다.

작은 한 생명의 이름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
작은 한 생명의 이름을 소중히 여기며 불러주는 마음!

<떡갈나무 바라보기>는 과학적 객관성만을 신뢰하는 인간의 시각으로 세계를 보지 말라고 은근히 설득한다. 동물들은 생활공간과 성장과 변화의 시간, 기질과 분위기에 따라 느끼고 활동하는 방식이 인간과 사뭇 다르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 동물들은 인간과는 다른 너무나 다양한 움벨트가 있음을 생물들의 생태적 특성과 생존방식을 통해 구체적으로 설명해 준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동물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감각을 잊어야 한다고 주문한다. 다시 말하면 개미나 돌고래, 박쥐, 부엉이, 개구리 등 다양한 생물에 대한 우리의 선입견이 얼마나 부당한가를 알려준다. 인간의 편협한 생각과 편의주의로 매사를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습관화된 움벨트를 버리라는 것이다. , 다른 세계의 진실을 만나려면 잠시 우리 자신을 잊어야 한다고 설득한다.

 

<떡갈나무 바라보기>5장으로 구성되었다.

 

가장 중요한 내용은 시간과 공간에 대한 개념이 모든 생물에게 동일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여러 가지 생명종의 생태적 삶을 통해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일백 년 가까이 사는 거북이와 하루밖에 못 사는 하루살이, 굼벵이로 11년 또는 17년을 살다 나오는 매미들이 느끼는 시간이 각기 다르다는 것이다. 한편, 진드기는 포유동물의 따스한 피에 알을 낳는다. 시각과 청각의 기능이 없는 진드기는 풀잎이나 나뭇가지에 무려 18년 동안이나 굶주린 채 매달려 있다가 토끼나 다람쥐 등 포유동물이 지나가는 순간 포유동물의 몸에서 발산하는 부티르산의 냄새를 감지해 포유동물의 몸으로 떨어져 기생한다고 한다. 이런 진드기의 시간과 인간의 시간 감각은 같을 수 없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 인간은 1초에 18개에서 24개의 이미지를 지각할 수 있지만 남아프리카의 나이프피시라는 물고기는 1초 동안 1,600가지의 전기충격을 구별할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사람은 약 15에서 15천 헤르츠의 범위에 이르는 소리를 구별할 수 있지만 돌고래는 4백에서 20만 헤르츠 사이의 소리 차이를 식별할 수 있다고 한다. 이러한 사례들은 하나의 고정된 시간관으로 세계를 파악하는 것이 얼마나 섣부른 세계 인식일 수 있는가를 잘 말해준다.

말하자면 시간과 공간은 물론 자연의 모든 일은 다 상대적이지 절대적인 기준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인간의 과학은 인간 중심적인 덫에 사로잡힌 경직된 사고의 결과라는 것이다. 절대적인 시간이란 없고 단지 생명력을 지닌 개체들이 자기 나름의 고유한 시간을 창조하며, 시간은 경험되고 조직되는 대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금강초롱의 움벨트와 섬초롱의 움벨트는 다르다! 그 다름을 인정하는 인간의 겸허함이 중요하다!
금강초롱의 움벨트와 섬초롱의 움벨트는 다르다! 그 다름을 인정하는 인간의 겸허함이 중요하다!

이 책은 또한 공간의 개념도 동물에 따라 다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여러 가지 예를 저자는 보여주고 있지만, 그중 흥미로운 사실은 소금쟁이의 세계는 2차원적이라는 것이다. 물 위를 미끄러지듯 소금쟁이를 잡아서 어항에 담아두고 관찰하면 위쪽이나 아래쪽에서 움직이는 물체에는 반응하지 않지만 수면을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반응한다는 것이다. 또한 짚신벌레는 앞이나 뒤 또는 오른쪽이나 왼쪽을 구별할 수 없는 공처럼 방향에 신경을 쓰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방향을 전혀 알아차리지도 못한다는 것이다. 한편, 올빼미와 개구리, 방울뱀 등은 상상을 초월한 감각을 가지고 있어서 인간의 공간에 대한 움벨트와 차원이 다르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수나방은 2.4km 떨어진 곳에 있는 암나방을 아주 희미한 냄새를 따라가 만나 짝짓기를 하고, 돌고래도 160km나 떨어져 있어도 암수가 대화를 하여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동물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모든 다양한 공간도 절대적인 것은 없고 각각의 동물들이 사물을 인식하는 방법에 따라 상대적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모든 생명체나 물체는 서로 다른 움벨트에서는 다르게 나타나고 다른 기능을 한다. 개의 움벨트는 벼룩의 움벨트와 다르다. 세계의 사물을 경험하는 시각은 아주 다양하다. 떡갈나무와 그것의 뿌리에서 가장 높은 가지까지 살고 있는 모든 생명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떡갈나무의 뿌리 사이에 구멍을 파고 사는 여우의 움벨트 속에는 나무뿌리와 땅속이나 지표면이 중요하고, 떡갈나무의 윗가지에 있는 까마귀 둥지를 자기 집으로 삼고 사는 올빼미는 나무와 하나가 되어 살아가는 나무 위의 세상이 중요하며, 떡갈나무줄기 중간쯤 나무껍질 겉과 속에는 또 다른 세계가 존재하는데, 그곳에서는 딱정벌레와 말벌들이 그들의 생명성을 이어간다. 그러나 사람들의 움벨트에서 떡갈나무는 사람마다 문화마다 다 다르다. 숭배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장수의 상징이자 식량의 근원이 되기도 하였으며, 두려움과 마법의 위협적인 얼굴이 되기도 하는 등 떡갈나무에는 많은 움벨트가 존재한다.

 

이와 같이 떡갈나무는 누구의 움벨트에서는 커 보이고 누구의 움벨트에서는 작아 보일까? 어떤 동물은 떡갈나무를 딱딱하다고 여기고 또 어떤 동물은 부드럽다고 생각할까? 떡갈나무에 대한 움벨트는 개체의 수만큼이나 다양할 수 있다는 것이 이 책을 읽고 나서 얻은 결론이다. 인간이 우주에서 볼 때면 작은 먼지에 불과하나, 벼룩에게는 거인처럼 보이며, 고래에게는 작은 꼬마 같이 보이듯이 말이다. 이처럼 세계에 대한 인간의 시각은 다양한 관점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이제 사람들만의 세계에서 벗어나 다른 동물들의 움벨트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면 다른 생명체를 존중하는 마음이 생길 것이고 인간과 자연의 조화로운 순환적 질서는 다시 회복될 것이다.

 

한마디로, 아직까지 현대 과학은 우리에게 동물들의 머릿속에 들어가 그들이 정확하게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게 해주지는 못한다. 그러나 적어도 동물들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려는 노력은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주디스 콜과 허버트 콜의 신념이 낳은 산물이 떡갈나무 바라보기이다.

 

과학이 자연 현상에 대한 객관적인 인식의 기준을 제공한다는 신념은 수정될 수밖에 없다!
과학이 자연 현상에 대한 객관적인 인식의 기준을 제공한다는 신념은 수정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작은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과학이 자연 현상에 대한 객관적인 인식의 기준을 제공한다는 신념은 수정될 수밖에 없다. 각기 다른 다양한 주관적 움벨트가 있기 때문이다.

과학은 이렇게 오차의 가능성 안에 존재하는 것이지 현실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절대적 객관성 안에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떡갈나무 바라보기는 우리에게 일깨워주기에 충분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학은 자연 현상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설명해 주는 객관적인 체계라고 하는 것은 과학에 대한 우리들의 편견이고 맹목적인 신뢰성 탓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끊임없이 움직이고 변화한다. 이런 가운데 과학적 연구가 지닌 특징은 움직이고 변화하는 세계를 고정시켜 변화하지 않는 죽어 있는 세계로 환원해야만 설명이 가능하다. 이런 전제에서 출발한 과학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지식의 체계라고 할 수는 없다. 과학기술이 우리의 생활에 가져다준 이점들을 향유하되 과학의 논리에 전적으로 끌려가서는 안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끊임없이 움직이고 변화한다.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고 가듯이...북한산(삼각산)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끊임없이 움직이고 변화한다.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고 가듯이...북한산(삼각산)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에 의하면, 자연nature은 인간의 의식으로부터 독립하여 존재하는 그 자체 안에 운동 변화의 원리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자연은 다양한 사물들이 그들의 특징적인 형태를 실현하기 위해 태어나서 성장, 쇠퇴, 사멸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갖는다는 뜻이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자신의 잣대로 모든 자연 현상을 파악하는 경향이 있다. 나의 왼쪽이 타인에게는 오른쪽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자신이 처한 곳을 기준으로 좌우를 구분하려는 강한 자기중심의 덫에 묶여있는 것이다. 그러나 개념의 구분은 주체가 처해 있는 곳을 기준으로 만들어지는 상대적인 개념이다. 따라서 움벨트는 주체인 생물의 수만큼 다양한 것이다.

오늘날 세계는 신자유주의 물결 앞에서 지역성과 문화의 다양성이 사라지는 위기에 처해 있다. 경쟁의 논리와 과학의 우월성만을 믿는 세력들은 거침없이 전 세계를 하나의 움벨트로 가두어 놓으려고 하고 있다. 한편, 우리 사회를 돌아보아도 숱한 갈등과 대립이 만연해 있고, 인간소외와 극심한 이기주의가 팽배해 가고 있다. 이는 사람 수만큼이나 다양한 움벨트를 서로 인정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려는 아량이 고갈되어가고 있고, 다양성 속에서 이루어지는 조화의 아름다움을 거부하는 편협한 아집이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다시 한번 제목의 의미를 생각해 보자. 다른 세계의 진실을 만나려면 잠시 우리 자신을 잊어야 한다는 간곡한 부탁을 명심해야 한다.

 

만물의 평등함을 일깨우는장자제물론(齊物論)의 한 구절을 인용하면서 독후감을 정리할까 한다. 절대적인 것으로 알고 있는 관념들이 실은 상대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 장자의 '제물론(齊物論)'의 핵심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이 절대적인 것이라고 믿고 있는 과학도 다른 세계의 다양한 움벨트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인간의 편협한 고정관념에서 자라난 독선이라는 것이다.

 

이제 너에게 한번 물어보겠네. 사람은 습한 데서 자면 허리가 아파 반신불수가 되어 죽게 되지만 미꾸라지도 그럴까? 사람은 나무 위에서 살면 벌벌 떨며 두려워할 것이지만 원숭이도 그럴까? 셋 가운데 어느 쪽이 바른 거처를 알고 있는 건가? 사람은 초식 동물의 고기를 먹고 순록은 풀을 뜯고 지네는 뱀을 맛있게 먹고 솔개와 까마귀는 쥐를 즐겨 먹지. 넷 가운데 어느 누가 올바른 맛을 아는 것일까?”

 

우리가 안다는 것은 얼마나 하찮은가&#44; 내가 알고 있는 것만 옳다고 고집하면 다른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
우리가 안다는 것은 얼마나 하찮은가, 내가 알고 있는 것만 옳다고 고집하면 다른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

우리가 안다는 것은 얼마나 하찮은가. ‘라는 정체성을 고집하지 말라는 것이다. ‘라는 정체성에 갇혀 있으면 다른 무엇을 받아들일 수 없다. 내가 알고 있는 것만 옳다고 고집하면 다른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 내가 아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면 아는 것만큼만 보일 뿐이다. 그래서 장자가 말하는 큰 앎은 많은 지식의 축적이 아니라 앎에 대한 열린 태도, 겸손한 마음을 말한다. ‘큰 앎을 깨달은 사람은 내가 알고 있는 것이 반드시 옳은 것이 아닐 수 있다는 열린 태도와 내가 다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겸손한 마음을 갖게 될 것이다.

 

(솔물새꽃의 교정일기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