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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수필쓰기

감꽃이 필 때 우리 만날까!

by 솔물새꽃 2023. 5.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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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꽃을 보면, 유두분면, 화장한 얼굴은 아니어도 감꽃에 비친 감꽃 닮은 얼굴들 생각난다!
감꽃을 보면, 유두분면, 화장한 얼굴은 아니어도 감꽃에 비친 감꽃 닮은 얼굴들 생각난다!

5월이 오면 나는 물빛 감꽃이 핀 고향 집 마당이 한없이 그립다. 푸른 감잎 사이로 언뜻언뜻 미소 짓는 순후한 감꽃, 그 감꽃이 핀 마당이 내게 해일처럼 밀려온까닭이다.

바로 그때, 감나무 그늘에서 금방 떨어진 싱싱한 감꽃을 맛보며 감잎 사이로 부서져 내리는 푸른 오월의 햇살을 처음 만났다. 감꽃 그늘에서 처음 본 아청鴉靑의 하늘과 청옥의 햇살! 이 하늘과 봄 햇살이 나를 키운 것이다. 오늘처럼 봄비 내리는 5월이면 무정하게 뚝뚝 떨어지고 마는 배고픈 감꽃의 물빛 눈망울이 나의 눈자위에 어른거린다. 감꽃이 떨어지고 말면, 감꽃이 떨어지고 말면, 나의 기다림과 보람은 살구가 익을 때까지는 잠시 사라지고 마는 까닭이다.

 

비록 우리가 가난할지라도 마음만은 부유하게 살 요량을 해야 하리라, 마음의 여유와 멋은 예나 지금이나 결코 소유한 것에 비례하지 않으니까, (마음으로 누리는 이 여유와 멋이 인생의 맛을 더하는 풍미라고 나는 믿고 싶다) 아직도, 여전히 5월이면 그 아득한 유년의 감나무 그늘에서 들었던 빗소리의 감촉이 생생히 살아오는 것은, 나의 마음에 그 오월의 감꽃이 피어나고 있음이리라, 장독대 돌담에 감꽃 떨어지는 미성微聲이 들렸음이리라, 아득히 멀어져 가는 유년의 감꽃 핀 5월의 마당, 바람에 높이높이 떠올라가는 방패연의 연실을 풀었다 감았다 하듯이 그리운 추억의 연실을 당겨본다.

 

그 허허한 마당에서 감꽃 향기를 쐬며 나의 영혼은 자랐다!
그 허허한 마당에서 감꽃 향기를 쐬며 나의 영혼은 자랐다!

나는 누구나 한 개인에게는 그 사람의 이 있다고 믿는다. 이것을 개인의 취향이나 풍류라고 해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인데, 오늘날 우리는 어떤 이유로든 자기 자신만의 고유한 멋과 맛, 곧 취향과 풍류를 잊어버렸거나, 잃어버렸거나, 스스로 포기하고 사는 경우가 거의 태반이어서 늘 아쉽고 마음 짠하기만 할 때가 종종 있다. (은 마음의 여유나 여백의 그늘에서 자라나는 천성일 것이므로 거의 타고난 성정이나 기질에 가깝기에 소유한 물질이나 쌓아 올린 한 개인의 명성과 전혀 무관하다고 나는 철석같이 믿고 사련다.)

을 나의 고향에서는 예로부터 남도풍南道風’, 또는 남도풍류南道風流’(남도의 맛과 멋)라 명명하면서 남도의 맛깔스러운 개미가 남도 소리(남도의 창이나 판소리나 육자배기, 진도 아리랑, 무가 등), 남도풍의 시원始原이라고 하는 것을 자주 들었다. 남도풍류의 이 남도 음식의 에서 유래했다고 유추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남도 음식은 남도 특유의 자연성(뻘밭과 황토밭)과 토속성을 갖는데, 보편적으로 한 지역의 음식이 지녀야 할 맛과 멋과 이야기(풍류와 흥과 정서와 노래와 놀이)가 깃든 남도 특유의 고유한 음식 이 바로 남도 의 근원이라 믿고 있기 때문이다.

 

유선추어탕집의 맛과 향과 인정을 잊을 수 없다. 주인장의 손님을 더 사랑하는 마음이 남도 풍류의 근간!
유선추어탕집의 맛과 향과 인정을 잊을 수 없다, 주인장의 손님을 더 사랑하는 마음이 남도 풍류의 근간!

 

바로 남도의 이 음식 ’(‘개미’)이 남도인의 기질인 은근과 끈기와 기다림과 '삭힘'이라는 성정의 뿌리가 되었음은 분명하다. 그리고 이 기질에서 남도 소리가 나오고 말과 노래와 춤이 나와 남도 예술로 승화되어 남도의 이 된 것으로 봐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에서 나왔다는 말은 곧 한 사람이 어려서부터 태생적으로 먹고 마시고 보고 듣고 한 것이 한 사람의 을 결정하는 중요한 인자라는 사실에는 아무도 이론을 달지 못할 것이리라. 그래서 어디서 나서 살았느냐와 무엇을 먹고 마시고, 무엇을 보고 듣고 자랐느냐가, 한 사람의 성정과 기질과 감성과 말, 곧 한 사람의 을 좌우하고 마는 것이다. 신토불이身土不二의 속뜻을 다 수긍할 것이리라, 한 사람을 이루는 것은 그 사람이 나서 자란 토속적 환경과 분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리할진대 인생살이 숱한 풍랑과 고비와 지루한 반복을 '맛'과 '멋'을 누리고자 하는 풍류와 낭만의 여흥이 없으면 어찌 감히 다 감내하랴,

 

죽란의 사랑채에 모여 시를 짓고 풍류를 누리며 마음의 본바탕을 지켜낸 선인의 낭만과 멋과 맛!
죽란의 사랑채에 모여 시를 짓고 풍류를 누리며 마음의 본바탕을 지켜낸 선인의 낭만과 멋과 맛!

옛적 다산茶山 정약용 선생은 ‘죽란 시사(竹欄詩社)’를 두어, 언제나 막중한 공무에서 물러 나와 건()을 젖혀 쓰고 초야의 울타리를 따라 걷기도 하고, 달 아래서 술을 마시고 시를 지으며, 고요한 산림과 과수원과 채소밭의 정취가 있는 곳에서 시속時俗 수레바퀴의 시끄러운 소음(벼슬과 물욕에 대한 탐심)을 거의 잊으며, 시가를 짓고 풍류를 누리며 마음의 본바탕을 잃지 않으려 했다고 한다. 이것이 이른바 죽란竹欄의 시모임인 다산의 ‘죽란 시사竹欄詩社’인 것이다.

인생 참살이의 진경이 아닐 수 없다. 내 고향 강진에 음식 맛이 깊어질 수 있었던 것도 알고 보면 다산이 18년 유배생활을 강진 도암 다산초당에서 한 덕택이 아닐까, 인생의 맛과 멋을 누릴 줄 안 다산! 그의 검약과 절제와 풍류와 낭만의 선풍仙風이 절로 느껴져 다산 정약용이 주도한 그 '죽란시사첩竹欄詩社帖'의 규약을 잠시 소개할까 한다. 장자莊子가 말한 소요유逍遙遊와 음풍농월吟風弄月의 진수와 그 멋을 고스란히 누리며 살았던 다산이었기 때문이다.

 

보리가 누렇게 익을 때 한턱낼테니 우리 보리가 익는 동네서 만나자고 약속하면 얼마나 좋을까...!
보리가 누렇게 익을 때 한턱낼테니 우리 보리가 익는 동네서 만나자고 약속하면 얼마나 좋을까...!

곰곰이, 천천히 읽으면서 깊이깊이 음미할 일이다! 진정한 행복과 삶의 맛이 무엇인가를 새삼 숙고해 봤으면 좋지 않을까, 삶의 여흥과 맛과 멋은 맛있는 음식을 함께 즐기고 나누며 융숭한 인정을 베푸는 데서 오는 것임을 바로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한턱내고, 또 한턱내고... 이런저런 핑계로 누가 한턱을 내면 '죽란'에 모여서 먹고 마시며 시를 짓고 노래하고 놀고 즐기는 것이 인생의 참 보람이요 낙이었던 것이다.

 

살구꽃이 피면 한 차례 모이고, 복숭아꽃이 처음 피면 한 차례 모이고, 한여름에 참외가 익으면 한 차례 모이고, 초가을 서늘한 바람이 불어 서지西池 (서쪽 연못)에 연꽃이 피면또 한 차례 모이고, 국화가 피어나면 한 차례 모이고, 겨울철 첫눈이 내리면 한 차례 모이고, 세모에 화분의 매화가 피면 한 차례 모이는데, 모일 때마다 술과 안주, 붓과 벼루 등을 준비하여 술을 마시며 시가를 읊조린다. 모임의 준비는 나이 어린 사람부터 시작하여 나이 많은 사람에 이르고, 한 차례 돌아 끝나면 다시 시작하여 이어 간다. 그러는 사이 아들을 낳은 사람이 있으면 한턱내고, 수령으로 고을 벼슬살이 나가면 또 한턱내고, 벼슬이 승진하면 그 사람이 또 한턱내고, 아우와 자제 중 집안에 과거 급제자가 나오면 또 그 사람도 한턱낸다.

 

이에 이름과 규약을 적고 제목을 '죽란시사첩竹欄詩社帖'이라 했는데, 그 모임의 대부분이 '竹欄(대나무 울타리)' 이 있는 우리 집(다산의 집) 사랑 죽란사竹欄舍에서 열린다.”

 

철과 절기와 삶의 매듭마다 여흥과 풍류와 노닒을 누렸던 선인들의 멋! 복숭아꽃이 피면 한턱내련다!
철과 절기와 삶의 매듭마다 여흥과 풍류와 노닒을 누렸던 선인들의 멋! 복숭아꽃이 피면 한턱내련다...!

한편, ‘죽란시사첩의 서문인 '죽란시사첩서'에는 8개 조항으로 된 모임의 규약도 전하는데, 참으로 맛깔스러운 삶의 흥이 절로 느껴진다. 인생을 즐길 줄 아는 여백, 여유와 낭만을 사랑하였던 것이다.

"아들을 낳은 계원이나 자녀를 결혼시킨 계원, 지방 수령이나 감사로 나간 계원, 품계가 올라간 계원은 모두 본인이 잔치를 한 차례 마련하여 계원에게 한턱낸다."

 

"매년 봄가을에 날씨가 좋으면 각 계원에게 서찰을 보내 유람할 곳을 낙점하고 꽃을 감상하거나 단풍을 즐기는 소풍을 주선한다."

 

이뿐인가, 모임의 규약 부칙에는 서문에 없는 '벌칙'에 대한 조항이 있는데, 몇백 년을 앞서 산 선인에게서 지금 우리가 가야 할 바른길을 다시 보며 마음을 곧바로 잡지 않을 수 없다.

 

멋과 맛은 그 어원이 비슷하다, 맛과 멋은 서로 뗄 수 없는 동전의 양면일 성싶다!
멋과 맛은 그 어원이 비슷하다, 맛과 멋은 서로 뗄 수 없는 동전의 양면일 성싶다!

"연회할 때 떠들썩하게 떠들어서 품위를 손상시키는 계원은 벌주 한 잔을 주고, 세상 사람의 과오를 들춰내 말하는 계원은 벌주 한 잔을 다시 준다."

 

"모두와 함께하지 않고 사사로이 작은 술자리를 갖는 계원에게는(의리와 신의를 저버린) 벌주 석 잔을 준다. 까닭 없이 모임에 불참할 때에도 벌주 석 잔을 준다."

 

다산 정약용이 이끌었던 풍류계 ‘죽란시사(竹欄詩社)’의 규약! 이른바 대나무 울타리(죽란竹欄) 모임의 풍류와 멋과 여유와 낭만을 지금 우리도 당장 따라 해 보면 어떨까,

 

천지에 만물을 이루는 것으로 마음을 삼으니 사람이나 천태만상의 태어남은 각기 천지의 기운을 얻어서 그 마음이 된다.’ 고 논어는 기록하고 있는데, 이 오월, 감꽃이 핀 유년의 마당에서 감꽃을 먹으며 보릿고개를 넘었던 사무치게 그리운 얼굴들이 보인다, 그 물빛 눈망울이 감꽃처럼 웃고 있는 것만 같다. 아직도 내 안에 감꽃이 핀 5월의 마당이 피어있음이리라.

 

그 물빛 감꽃 눈망울이 내 안을 아직도 지켜보고 있을 때는 얼마나 큰 보람이랴!
그 물빛 감꽃 눈망울이 내 안을 아직도 지켜보고 있을 때는 얼마나 큰 보람이랴!

감꽃 - 김삼규

 

그냥 그냥 서럽다 좋다가 좋았다가 눈물 난다 감꽃이 피었다고 감꽃이 피기 시작한다고 마냥 외치리라 울 엄마도 울 누님도 송아지도 백구도 모다 모다 다 그립다 감꽃 핀 어느 봄날이 해일처럼 밀려온다 장독대 돌담에 감꽃이 내리면 얼굴마다 감꽃이 피었다고 좋아했다 유두분면油頭粉面, 화장한 얼굴은 아니어도 감꽃에 비친 감꽃 닮은 얼굴들 봄비에 배고픈 눈물 감꽃이 핀다 감꽃이 내린다 눈물꽃 반짝이는 감꽃의 미소 감꽃 같은 눈물이 뚝뚝 흐른다 감꽃 같은 사람들 무색무취 물빛 같은 사람들 평등한 마당 같은 감꽃 얼굴들 반질반질한 토방 같은 봄 햇살의 가슴들 그러나 꿈에도 오지 않는 사람들 하늘이 좋아 서둘러 하늘 간 사람들 감꽃은 피었는데 감꽃 핀 오월은 벌써 와 기다리는데 감꽃 핀 오월이면 달달한 감꽃 향기 쐬며 모였던 그 자리 마당 넓은 감꽃 그늘에서 우리 만날까

 

감꽃 같은 사람들 무색무취 물빛 같은 사람들 평등한 마당 같은 감꽃 얼굴들이 5월이면 그립다!
감꽃 같은 사람들 무색무취 물빛 같은 사람들 평등한 마당 같은 감꽃 얼굴들이 5월이면 그립다!

 

*감꽃 핀 마당이 오월이면 내게 해일처럼 밀려온다, 오늘처럼 봄비 내리는 날이면 무정하게 뚝뚝 떨어지는 감꽃 지는 소리, 배고픈 감꽃의 물빛 눈망울이 나의 눈자위에 하염없이 어린다. (감꽃 사진은 다음카페에서 인용함을 밝힘)

 

20230508, 솔물새꽃의 오금동일기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