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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수필쓰기

왕버드나무 그늘 아래서!

by 솔물새꽃 2023. 5.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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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남은 길이 이 길이기를 기도한다!
나의 남은 길이 이 길이기를 기도한다!

나의 남은 갈 길이 늘 왕버드나무 그늘로 이어진 길이기를 갈망한다.

 

나는 늘 글을 시작할 때면 틀림없이 나의 고향 마을 앞 왕버드나무 그늘에 서 있다. 이 버드나무 아래 서 있으면, 백 년 세월이 흘러가고 다시 천년 세월이 흘러와도 이 노거수를 지켜왔던 사람들의 숨결이, 이 왕버드나무 그늘에서 느긋하게 인생의 풍랑을 기다렸던 사람들의 지혜와 삶의 애잔한 이야기가 들려오는 까닭이다. 그리고 나는 찔레꽃 핀 마을 앞 우물 속 아청빛 하늘을 보고 있거나, 봄날 강언덕 삐비꽃을 한 움큼 손에 쥔 채 아버지를 기다리는 어린 소년이 되어 있다.

 

그러므로 유년의 어린 시절 은빛 윤슬 흐르는 강과 아늑한 아청鴉靑의 하늘과 마을 앞 왕버드나무 그늘에서 자란 나의 글에는 항상 하늘과 물의 노래와 논두렁 가르마 길, 봄바람과 흙냄새와 물 냄새가 그물처럼 켜켜이 얽혀다. 지금도 여전히 시적감흥이 일어날 때면 유년의 고향 체험은 현재의 시간 속으로 스멀스멀 흘러나온다. 그래서 나의 노래에 물빛 찔레꽃 눈망울이 늘 비치는 것은 어쩌면 숙명일지 모를 일이다.

 

한 생명이 씨앗에서 움이 나고 그 움이 자라는 것은 수많은 빛과 그늘 덕택이다. 부모와 스승과 숲의 빛과 그늘, 산과 강언덕과 흙과 물의 그늘, 불후의 고전의 그늘 등, 누군가의 끈질긴 기다림과 보살핌과 정성으로 쌓아 올린 그늘이 아니고서야 사람은 절로 자신의 꿈과 삶을 이루어낼 수 없다. 한 사람의 길은 '빛과 그늘' 아래서 이뤄지고 다시 누군가에게 '빛과 그늘'을 드리우며 유한한 인생의 강을 너울너울 건너간다. 이 순수한 자연의 그늘 아래서 움이 나고 키가 자라고 풋풋한 영혼의 영토를 터전 삼아 살아온 나는 얼마나 행복하고 또 호젓하였던가,

 

천년 세월이 가고 다시 천년 세월이 와도 이 노거수를 지켜냈던 사람들, 이 버드나무 그늘 아래서 느긋하게 인생의 풍랑을 넘었던 사람들!
천년 세월이 가고 다시 천년 세월이 와도 이 노거수를 지켜냈던 사람들, 이 버드나무 그늘 아래서 느긋하게 인생의 풍랑을 넘었던 사람들!

 

나의 생애에 봄소풍 길처럼 마음 흥성거림이 붐빌 때 있었을까,

 

오늘도 나의 하루 이 길이 소싯적 봄소풍 가는 그때 그 길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오늘 나의 가는 길이 참새미 고개 너머 탱자나무 그늘에서 샘물 마시고 입 안 가득한 왕눈깔사탕을 맛보며, 보물 찾으러 날아올랐던 봉덕산 소풍 가는 그 길에 닿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노르스름한 윤기 자르르 흐르는 차진 찰밥 고실고실한 멸치볶음 짭조름한 갈치구이, 술빵처럼 모락모락 부풀어 오른 봄소풍의 설렘과 보람, 해마다 오는 봄소풍은 어린 나의 오랜 기다림이었다. 지금도 봄이면 새록새록 피어나는 봄의 꽃망울이다. 그 시절, 잠자리 들 때마다 토방 마루에 앉아 앞산 하늘의 달과 별을 보며, 제발 비 오지 않게 해주세요, 제발 하늘 햇살 청명한 날을 보내주세요, 두 손 모아 쥐고 기도하며 목마르게 기다렸던 봄소풍, 드디어 봄 소풍이 하루 뒤로 다가오면, 엄마는 동생에게는 오 원 지폐 한 장을, 형인 나에게는 십 원 지폐 한 장을 쥐어 주셨다. 얼마나 신나고 오졌던가, 도저히 잊을 수 없는 날! 일 년 내내 언제 이 십 원짜리 거금을 주머니에 넣어보랴,

 

구불구불 도랑물 흐르는 풀섶을 지나, 장다리꽃 유채꽃 봉곳이 피어오른 황톳길 저수지 둑을 넘어, 두어 번의 실개천을 건너 멀리 봉덕산 능선이 보이기 시작할 때면, 풍선처럼 둥둥 날아오르고 싶었던 길, 절로 종다리가 되고 졸졸 노래하는 도랑물이 되고 구름처럼 두둥실 신바람 아지랑이 피어올랐던 소풍 길, 징검다리 건널 때면 꼭 헛발을 밟아 소풍을 망친 아이들도 간혹 있었지, 물에 빠진 그 아이가 하도 애처로워 삶은 거위알을 살짝이 건네주며 젖은 눈시울을 다독여준 적도 있었던 길, 오늘이 그 길로 가는 길이라면 얼마나 좋으랴,

 

무엇보다 나에게 봄 소풍의 절정은 봉덕산에 올라 바다와 섬을 보는 일이었다네, 산꼭대기에 오르면 늘 마음으로만 그려보던 바다와 섬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볼 수 있었으니 얼마나 부푼 기다림이었는지 몰라, 나는 소풍행렬에서 슬며시 빠져나와 숨이 차오르는 것도 잊은 채 봉덕산 꼭대기에 단숨에 내달려 올라, 꿈에서도 쉬이 볼 수 없었던 바다와 섬을 나의 두 눈으로 생생히 보았던 거네, 눈에는 나도 모르게 구슬 같은 눈물방울이 흐를 때도 있었지, 앞산 고개 너머 보이지 않는 바다와 섬을 늘 꿈꾸며 기다려온 나의 하루하루, 봄소풍의 절정은 항상 바다를 보는 일이었다네, 그 푸른 바다에 떠 있는 섬을 안고 돌아오는 길이 봄소풍 길이었으니까,

 

바다와 섬 섬과 바다, 나의 평생 내면의 절실한 지향이 되어버린 그 봉덕산 산길을 오늘도 따라 걸어볼 수 있다면 나의 맘이 얼마나 오지랴, 아직도 내 의식의 배면에 꼭 봉인된 내 유년의 풍경들, 오늘도 이 하루의 길이 그 그늘에 닿을 수 있다면, 아마 내 맘에는 보름달 떠올라 둥둥 떠 흐를 것이리라, 그 소풍 길에서 나의 키는 자랐으니 어찌 그리움이 노을 타오르지 않으랴,

 

저 아청의 강물과 하늘을 보며 나는 소풍을 기다렸다, 그 길 그 그늘에서 나의 키는 자랐으니까!
저 아청의 강물과 하늘을 보며 나는 소풍을 기다렸다, 그 길 그 그늘에서 나의 키는 자랐으니까!

 

아청鴉靑의 강물과 하늘을 보며 나는 다시 가을소풍을 기다렸다, 그 길 그 그늘에서 나의 키는 무럭무럭 자랐고, 영혼의 눈빛은 푸름푸름 깊어만 갔다.

 

가을소풍이 무너미고개로 해 떨어지듯 내 맘에 서둘러 다시 와서 만덕산 다산초당 앞을 지나자고 할 때면, 나는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봉곳한 모퉁이에 서서 우두커니 바다를 응시하다가 숨차게 돌아오곤 하였다네, 혼자인 줄도 모르고, 소풍 대열에서 멀어지는 줄도 모르고, 그런데, 그런데, 나의 강이 바다와 만나 하나의 드넓은 바다에 닿는 것을 보고 말았다네, 구강포 포구에 다다른 내 유년의 탐진강은 어디 온데간데없이 흔적도 없고, 아청鴉靑의 탐진강은 그 어디서도 찾을 수 없음을 알았을 때, 그만 강의 일생이 끝나고 만 것을 나는 그 길에서 처음 보았었지, 허무하게 나의 강을 삼켜버린 바다가 얼마나 원망스러웠던지, 강의 일생이 끝나버린 죽음과 이별, 외로움과 같은 원초적인 운명의 작은 겨자씨가 내 가슴에 뿌려진 날이 아마 그 가을소풍 길이었을 것이네,

 

나를 키워준 강, 내 안을 여전히 흐르는 강, 강둑에 하얀 삐비꽃이 피면 봄은 온통 나의 보람이었지, 하얀 두루마기를 날리며 탐진강 징검다리를 건너오던 울 아부지, 강을 굽어보며 하늘을 쳐다보며 구름을 바라보며 먼 산의 형상을 그리며 자운영 꽃바람 품에 들이며 청보리밭을 뛰어놀았던 내 유년의 길, 길고 푸른 강언덕의 그늘과 사인정 솔나무 그림자, 그 그늘이 나의 가슴과 눈물의 길을 맑히며 이만큼 나를 지켜낸 것이었다네,

 

'솔밭등' 소나무는 온갖 풍상을 다 알고 있으리라, 저 소나무 그늘이 나의 언어요 나의 빛깔이요 내 영혼의 쉼터다!
'솔밭등' 소나무는 온갖 풍상을 다 알고 있으리라, 저 소나무 그늘이 나의 언어요 나의 빛깔이요 내 영혼의 쉼터다!

 

솔밭등 왕소나무는 온갖 풍상을 다 알고 있으리라, 저 소나무 그늘이 나의 언어의 집이요 나의 천생 빛깔이요 나의 눈물의 원류다!

 

솔밭등 왕소나무는 희미하게 다 사라져 간 온갖 세월의 풍상을 다 알고 있을 것인데, 종일 앉아 기다려도 말을 해주지 않는 묵연한 소나무, 소나무 그늘은 나의 언어요 나의 빛깔 나의 소리 나의 눈물의 원류가 되었을 것이네, 장흥 읍내 장에 가신 아버지를 기다리곤 하였던 강둑으로 이어진 길목, 아름드리 소나무 대여섯 그루가 동네를 호위하고 있었던 솔밭등, 마을에서 외따로 떨어져 있는 그곳에 주점이 하나 있었는데, 장에 가신 아버지를 기다릴 때마다 나의 눈길이 오래 머물곤 하였던 주점의 왕눈깔사탕, 그 주점에서 사탕을 한 줌 사 내 입에 넣어주신 아버지는 흥에 겨우시면 나를 집 대문 앞까지 등에 업어주시면 육자배기 흥타령을 늘어놓으셨지, 내 가슴에 아직도 식지 않고 흐르는 아버지의 온기, 나의 귀에 애닲은 진양조 선율!

 

(나는 솟을대문을 열면 탐진강이 바로 지척에 보이는 장흥에서 나서 6살까지 자란 후, 바로 옆 고을 강진으로 이사와 성장하였다. 어찌 보면 나의 고향은 장흥과 강진, 두 곳이 맞다.) 내 영혼이 늘 달려가는 아늑한 탐진강이 사라진 것을 눈물 젖은 두 눈으로 또렷이 바라보았던 그곳, 그 자리, 어린 나의 눈에 남포 바다의 품은 얼마나 끝없이 넓었던지, 얼마나 막막하고 은빛 윤슬 반짝이며 눈부셨던지, 감탄과 눈물을 주체할 수 없어 혼자만 끙끙 앓았던 그날 가을소풍, 훗날 바다는 고스란히 내 안에 들어와 내 마음속 바다가 되어 여전히 넘실거리고 있었으니, 길에서 길로 이어진 긴 생애의 강은 여전히 내 마음 바다를 이루어 흐르고 있다네,

 

그 후, 나의 바다에 올망졸망 섬 몇 개 떠올라 있었고, 질옹배기에 반짝이는 햇살이 강을 잃어버린 섭섭한 나의 눈물을 닦아줄 때면, 어느새 내 마음은 봄 바다에 뜬 섬이랑 하나가 되었다네, 아침 눈을 뜨면 나의 창가에 벌써 밀려와 나를 기다리는 섬 하나, 별처럼 꽃처럼 환히 반짝이는 섬 하나, 내 맘이 심심하면 혼자서도 소풍 가는 백련사 동백꽃 그림자 떠 흐르는 꼬막섬이 보이는 길, (섬들은 꼭 바다에 핀 동백꽃 같았다네) 나의 섬이 호젓이 쓸쓸해 보이는 남포 앞바다로 이어진 길, 지금은 갈대꽃 날리는 흰 고니들의 겨울 쉼터, 오늘이 그 길로 소풍 가는 길이었으면 얼마나 좋으랴, 마음은 하도 빨라서 하루에도 서너 번씩 걸어보다 돌아오는 남포바다와 탐진강 포구!

 

사라진 모든 것들은 마음 바다에 뜬 섬이 되어 나를 기다린다, 그리움으로 피어나 나를 부른다!
사라진 모든 것들은 마음 바다에 뜬 섬이 되어 나를 기다린다, 그리움으로 피어나 나를 부른다!

 

그리움처럼 사라진 모든 것들은 마음 바다에 뜬 섬이 되어 나를 부른다, 나를 기다린다!

 

지금도 나를 따르는 길, 지금도 나를 붙잡아 이끄는 많고 많은 길, 어린 소년처럼 도랑물 건너 동구 밖 들로 산으로 내달려가고 싶은 길, 그 길이 눈앞에 선하면 틀림없이 나는 왕버드나무 그늘과 왕소나무 그늘 아래 어린 소년이 되어 아청 하늘을 바라보며 서 있다. 더욱이 해거름이면 숲의 그늘로 귀소하는 한 마리 새가 된다.

 

나의 지나온 길이 늘 노을 진 우수의 길처럼 아름다운 그늘이 되기를 기다린다!
나의 지나온 길이 늘 노을 진 우수의 길처럼 아름다운 그늘이 되기를 기다린다!

 

오늘, 이 하루의 길이 내 마음 타오르는 우수의 노을길이었으면 얼마나 좋으랴,

 

 

20230506, 솔물새꽃의 오금동일기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