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보면 더 잘 보이는 길, 지나온 길을 돌아보는 일은 남은 길을 더 잘 가기 위함이다. 길 위에서 길을 보며 다시 길을 간다. 길은 오직 길만이 그 길을 안다. 오직 시간만이 인생을 알듯이...
지나온 길을 아는 일은 가야 할 길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를 알기 위함이다. 우리의 남은 길이 얼마나 될지 모르지만, 비록 짧을지라도 그 길을 잘 갈 수 있으면 얼마나 다행한 일이겠는가, 산의 길이든 신앙의 길이든 도모하는 사업의 길이든 오늘 하루의 길이든, 그 길이 기쁨과 보람이 흐르는 길이기를 기다리면서, 누구나 길을 가는 나그네로 산다.
자연의 길이 사람의 길임을 나는 믿는다, 물이 흐르는 길이나 저녁놀이 스러지는 길, 계절이 오가는 길과 꽃이 피고 지는 길이 사람의 길과 별반 다를 바 없음을 나는 믿는 것이다. 누군가 앞서간 길은 틀림없이 뒤에 오는 누군가의 길이 다시 된다. 앞서간 사람의 흔적은 얼마나 고마운 발자국인가, 산에서 책에서 역사에서 나는 오늘도 배운다, 늘 깨닫는다, 그리고 감사한 마음을 무한히 그들에게 보낸다.
특히 산길을 좋아한 나는 산에서 많은 것을 감각적으로 체득한다. 누군가 먼저 밟고 간 흔적이 쌓이면 길이 열린다는 것을, 그런 점에서 산길은 반드시 뒤따라오는 누군가의 길이 된다. 이 길은 얼마나 고마운 길인가, 내가 간 길이 누군가 뒤에 오는 이의 길이 된다는 것을 생각하면 뭉클한 겸손과 감동이 일어난다. 나의 뒤를 따르는 누군가를 위해 좋은 길을 가야겠다는 다짐도 해본다. 그래서 늘 산에서 사람의 길, 도덕을 성찰한다. 내가 산의 길을 틈만 나면 자주 가는 까닭이다.
길 - 김삼규
돌아보는 길이 더 잘 보인다
지나온 길은 돌아보아야 더 잘 보인다
산등성이에 올라 물 한 모금 마실 때
비선대에 서서 지나온 길을 돌아볼 때
무너미삼거리에서 천불동 물소리를 다시 부를 때
건너온 공룡능선의 준령이 보이기 시작한다
깊디깊은 천불동 만학천봉이 물결친다
타고 넘어온 가파른 길이 드디어 보인다
파도를 넘는 조각배처럼 숲의 바다를 밀려온 길
건너올 때 보지 못했던 기암절애의 형상과 질곡의 심연이
돌아볼 때 훤히 더 잘 보인다
가끔 앞만 보고 가던 길을 멈추고 뒤돌아볼 일이다
마등령을 훨훨 날아오르는 물안개의 옷자락에서
물에 젖은 물소리가 더 잘 들리듯이
길 다 지나가고 물 다 흘러가고 바람 다 잦아든 겨울
봄 여름 가을이 다 떠나가 버린 텅 빈 겨울 숲에서
그 결빙의 길을 걸어 보아야 지나온 갈봄 여름의 길이 보이듯이
물소리 바람소리 새소리가 아스라이 더 잘 들리듯이
돌아보며 읽는 길
돌아보며 아는 길
돌아보며 너를 부른다, 돌아보며 다시 나를 생각한다
이 고적한 겨울 산길을 거닐며 너와 내가 걸어온 눈물이 말라버린 삭막한 길을
식어버린 인정과 거짓과 무관심이 난무했던 네온사인 번득이는 길을
쓸쓸하게 눈이 시리도록 가슴이 아리도록 바라본다
돌아보면 보이는 너와 나의 짧은 길, 아쉬움과 수줍은 독백이 흐르는 길,
가끔은 돌아볼 일이다, 서둘러 앞만 보고 왔던 길 멈춰서 돌아볼 일이다
지나온 길을 돌아보는 일은 남은 길을 더 잘 가기 위함이다
돌아볼 때라야 길은 하늘에 닿아 있는 것도 보인다
산이 보이고 길이 보이고 함부로 함부로 큰 소리 지르며 지나온 시간도 보인다
섣달 그믐 세한의 길목은
오욕의 등골을 타고 내리는 되돌아갈 수 없는 회한의 바람 불어오고
산은 텅 비어있는데 산은 묵연한 겨울인데
내 안에 잉잉 우는 잠들지 못한 겨울바람
내 영혼 아려오는 통증은 밤새 멈출 줄 모르고 창을 흔들며
밤을 결박한 나태와 안일과 허세와 오만과 거짓의 어두운 그림자
산의 품에 안긴 밤이면 밤새 유령처럼 얼마나 신음하였던가
길은 다시 길로 이어지고, 그 길 위에서 길을 본다
돌아볼 때면 더 잘 보이는 내 영혼의 샹그릴라가 산 너머 달처럼 떠오르는 길,
내 안의 나를 찾아가는 길,
낮은 데서 보아야 더 거룩해 보이는 산의 염결
겨울이 되어서야 하늘에 닿는 산의 길이 더 잘 보이듯이
지나온 길의 흔적들이 더 잘 보이는 것은 텅 빈 겨울 탓일까
이제야 늦은 겨울 숲에서 마침내 산을 본다, 더 가야 할 길을 본다
뒤돌아보면 벌써 고개를 넘고 있는 해거름 짧은 하루의 긴 그림자
산은 무엇일까, 길은 무엇일까, 난해한 긴 질문이 어둠처럼 다시 길이 된다
모든 길은 칠흑의 밤바다에 잠기고 서둘러 하늘엔 별의 길이 보인다
(이 ‘길’은 지난 2022년 12월 30일 결빙의 겨울 설악 대청을 만나고 설악동 숙소로 돌아와 쓴 글이다. 작년 일 년 동안 나는 9번 설악을 만났지만 여전히 설악을 모른다. 산의 깊은 뜻 그윽한 숨결을 어찌 아랴, 그러나 나는 설악을 느낀다, 늘 설레는 맘으로 나를 부르는 설악을 기다린다,)
20230616, 솔물새꽃의 오금동일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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