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와 수필쓰기

'죽란시사첩', 다산의 멋과 풍류를 배우다!

by 솔물새꽃 2023. 5. 24.
728x90

큰 아들을 결혼시킨 조원장이 친구들에게 한턱낸 자리, 멋과 인정을 듬뿍 담아온 친구의 인생이 더욱 풍성하기를...!
큰 아들을 결혼시킨 조원장이 친구들에게 한턱낸 자리, 멋과 인정을 듬뿍 담아온 친구의 인생이 더욱 풍성하기를...!

죽란시사竹欄詩社, 다산茶山의 멋과 풍류를 배우다!

한턱낸다는 연락이 왔다! 일전 아들 혼사를 치른 고교 동창 친구가 한턱낸다고 하여, 서울에 사는 고3 같은 반 친구 다섯이 오랜만에 함께 모였다. 누구랄 것도 없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풋풋한 청춘의 봄날로 벌써 우리는 가 있었다. 파격의 대화를 즐기며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한 친구가 한턱낸 자리 덕분에 세월의 강을 거슬러 놀아본 것이다.
 
자녀를 결혼시키는 혼례식이나 서러운 장례식장이 아니면 반가운 친구의 얼굴 보기도 기별 듣기도 좀처럼 어려운 시절이다. 메마른 가뭄에 하늘만 쳐다보며 단비 기다리는 격이니 어찌 한턱낸다는 연락이 반갑지 않으랴, 좋은 일이든 궂은일이든 삶의 크고 작은 매듭을 짓고 결기를 다질 때마다 벗들을 불러 한턱낸 자리를 마련했던 옛 선인들의 멋과 풍류, 그 시절 그 따스한 인정과 여유와 낭만이 삼삼하기만 하다, 몹시도 그립다!

 

퇴임하여 아들을 결혼시킨 친구가 다시 한턱낸다고 여나무명의 벗들을 불러 한턱을 베풀어 실컷 웃으며 놀았다!
퇴임하여 아들을 결혼시킨 친구가 다시 한턱낸다고 여나무 명의 벗들을 불러 한턱을 베풀어 실컷 웃으며 놀았다!

이 ‘멋’을 나의 고향에서는 예로부터 ‘남도풍南道風’, 또는 ‘남도풍류南道風流’(남도의 맛과 멋)라 명명하면서 남도의 맛깔스러운 ‘맛’의 ‘개미’가 남도 소리(남도의 창이나 판소리나 육자배기 진도 아리랑, 서러운 씻김굿 남도 무당의 노래 무가 등), 남도풍류의 시원始原이라고 하는 것을 자주 들었다.

남도풍류의 ‘멋’이 남도 음식의 ‘맛’에서 유래했다고 유추한 그럴듯한 풀이를 한 것이다. 맞는 말이다, 남도 음식은 남도 특유의 자연성(뻘밭과 황토밭)과 토속성을 갖는데, 보편적으로 한 지역의 음식이 지녀야 할 맛과 멋과 이야기(풍류와 흥과 정서와 노래와 놀이)가 깃든 남도 특유의 고유한 음식 ‘맛’이 바로 남도 ‘멋’의 근원이라 믿고 있는 주장이어서 누구에게나 설득이 있다.
 
바로 남도의 이 음식 ‘맛’(‘개미’)이 남도인의 기질인 은근과 끈기와 기다림과 '삭힘'이라는 성정의 뿌리가 되었음은 분명하다. 그리고 이 기질에서 남도 소리가 나오고 남도의 구수한 말과 노래와 춤이 나와 남도 예술로, 남도풍류로 승화되어 남도의 ‘멋’과 '맛' , 남도 서편제와 육자배기와 아리랑이 되었을 것으로 봐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 같다.
 
옛적 다산茶山 정약용 선생은 ‘죽란시사(竹欄詩社)’를 두어, 언제나 막중한 공무에서 물러 나와 건(巾)을 젖혀 쓰고 초야의 울타리를 따라 걷기도 하고, 맘이 맞는 벗들과 달 아래서 술을 마시고 시를 지으며, 고요한 산림과 과수원과 채소밭의 정취가 있는 곳에서 시속時俗의 시끄러운 소음 (벼슬과 물욕에 대한 탐심)을 거의 잊고, 시가를 짓고 창을 하며 마음의 본바탕을 잃지 않으려 했다고 한다. 이것이 이른바 ‘죽란竹欄의 시모임’인 다산의 ‘죽란시사竹欄詩社’인 것이다.
 

서울에서 의료사업을 접고 제주도 한 의료원으로 떠나는 친구의 송별연을 가까운 벗들끼리 마련하여 또 아쉬움과 인정을 나누었다!
서울에서 의료사업을 접고 제주도 한 의료원으로 떠나는 친구의 송별연을 가까운 벗들끼리 마련하여 또 아쉬움과 인정을 나누었다!

다산의 죽란시사竹欄詩社는 인생 참살이의 진경이 아닐 수 없다. 내 고향 강진에 음식 맛이 깊어질 수 있었던 것도 알고 보면 다산이 18년 유배 생활을 강진 사의제와 도암 다산초당에서 보낸 덕택이 아닐까, 인생의 맛과 멋을 누릴 줄 안 다산의 철학과 실천이 이 고을에 선한 영향을 끼쳤을 것이니까!

그의 검약과 절제와 풍류와 낭만의 선풍仙風이 절로 느껴져 다산 정약용이 주도한 그 '죽란시사첩竹欄詩社帖'의 규약을 다시 선양해볼까 한다. 고대 중국의 장자莊子가 말한 소요유逍遙遊와 음풍농월吟風弄月의 진수와 그 멋을 고스란히 누리며 살았던 다산이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긴 유배의 형극을 지내는 길은 이런 파격의 여백과 여흥을 마음에 들이지 않고서는 도저히 불가능했을 것이리라. 
 
곰곰이, 그리고 천천히 ‘죽란시사’를 읽으면서 깊이깊이 음미할 일이다! 진정한 행복과 삶의 맛이 무엇인가를 새삼 숙고해 봤으면 좋지 않을까, 싶어서다. 삶의 여흥과 맛과 멋은 탐욕을 버리고 명리를 내려놓고 맛있는 음식을 함께 즐기고 나누며 융숭한 인정을 베푸는 데서 오는 것임을 바로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한턱내고, 또 한턱내고, 이런저런 핑계로 누가 한턱을 내면 '죽란'에 모여서 먹고 마시며 시를 짓고 노래하고 놀고 즐기는 것이 인생의 참 보람이요 즐거움이라고 다산은 깨달아 몸소 실천하며 살았던 것이다. 삶의 진실한 맛과 멋을 투명하게 인식하고 실천한 다산이었다.
 

코19의 길고 지루한 강을 건너온 나의 우암회! 한턱내고 한턱 또 내며 인생 참살이의 길을 잘도 건너오고 있다!
코19의 길고 지루한 강을 건너온 나의 우암회! 한턱내고 한턱 또 내며 인생 참살이의 길을 잘도 건너오고 있다!

“살구꽃이 피면 한 차례 모이고, 복숭아꽃이 처음 피면 또 한 차례 모이고, 한여름에 참외가 익으면 한 차례 모이고, 초가을 서늘한 바람이 불어 서지西池 (서쪽 연못)에 연꽃이 피면 또 한 차례 모이고, 국화가 피어나면 한 차례 모이고, 겨울철 첫눈이 내리면 한 차례 모이고, 세모에 화분의 매화가 피면 한 차례 모이는데, 모일 때마다 술과 안주, 붓과 벼루 등을 준비하여 술을 마시며 시가를 읊조린다. 모임의 준비는 나이 어린 사람부터 시작하여 나이 많은 사람에 이르고, 한 차례 돌아 끝나면 다시 시작하여 이어 간다. 그러는 사이 아들을 낳은 사람이 있으면 한턱내고, 수령으로 고을 벼슬살이 나가면 또 한턱내고, 벼슬이 승진하면 그 사람이 또 한턱내고, 아우와 자제 중 집안에 과거 급제자가 나오면 또 그 사람도 한턱낸다.

이에 이름과 규약을 적고 제목을 '죽란시사첩竹欄詩社帖'이라 했는데, 그 모임의 대부분이 '竹欄(대나무 울타리)' 이 있는 우리 집(다산의 집) 사랑 죽란사竹欄舍에서 열린다.”

 
얼마나 멋진가! 얼마나 여백의 풍미가 자연스러운가! 다산의 앎과 삶이 이렇듯 조화로운 것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가, 나는 그의 드넓고 깊은 학문에서 왔다고 믿는다. 자연과 인간의 본질을 궁구한 그의 철학에서 왔으리라 확신한다. 한편, ‘죽란시사첩’의 서문인 '죽란시사첩서'에는 8개 조항으로 된 모임의 규약도 전하는데, 참으로 맛깔스러운 삶의 흥이 절로 느껴진다. 인생을 즐길 줄 아는 여백, 여유와 낭만을 사랑하였던 것이다.
 

살구꽃 피는 봄이 오면 우리 다시 만날까, 벗을 기다리는 설렘처럼 봄은 금세 오고야 말리라!
살구꽃 피는 봄이 오면 우리 다시 만날까, 벗을 기다리는 설렘처럼 봄은 금세 오고야 말리라!

"아들을 낳은 계원이나 자녀를 결혼시킨 계원, 지방 수령이나 감사로 나간 계원, 품계가 올라간 계원은 모두 본인이 잔치를 한 차례 마련하여 계원에게 한턱낸다."
 
"매년 봄가을에 날씨가 좋으면 각 계원에게 서찰을 보내 유람할 곳을 낙점하고 꽃을 감상하거나 단풍을 즐기는 소풍을 주선한다."

이뿐인가, 모임의 규약 부칙에는 서문에 없는 '벌칙'에 대한 조항이 있는데, 몇백 년을 앞서 산 선인에게서 지금 우리가 가야 할 바른길을 다시 보며 마음을 곧바로 잡지 않을 수 없다.

"연회할 때 떠들썩하게 떠들어서 품위를 손상시키는 계원은 벌주 한 잔을 주고, 세상 사람의 과오를 들춰내 말하는 계원은 벌주 한 잔을 다시 준다. “.“
 
"모두와 함께하지 않고 사사로이 작은 술자리를 갖는 계원에게는(의리와 신의를 저버린) 벌주 석 잔을 준다. 까닭 없이 모임에 불참할 때에도 벌주 석 잔을 준다."
 
혼자 떠들지 말고 벗의 이야기를 들어주라고, 남을 미워하거나 시기 질투하지 말라고, 의리와 지조와 우정을 지키라고... 이 규약을 지키지 못한 사람에게 내리는 '벌'도 재미 있다! 벌주 한 잔이거나, 벌주 석 잔이다! 가히 다산의 인품과 학문의 향기가 가슴 저류까지 느껴진다.
 

곧은 왕대나무처럼, 해마다 밀고나오는 왕죽순처럼 생애의 삶이 바르게 지조있게 서로 맑히며 흘러가기를 바랄 뿐이다!
곧은 왕대나무처럼, 해마다 밀고나오는 왕죽순처럼 생애의 삶이 바르게 지조있게 서로 맑히며 흘러가기를 바랄 뿐이다!

다산 정약용이 이끌었던 풍류계 ‘죽란시사(竹欄詩社)’의 규약! 이른바 대나무 울타리(죽란竹欄) 모임의 풍류와 멋과 여유와 낭만을 지금 우리도 당장 따라 해 보면 어떨까, 보리가 익고 다시 살구가 익을 때 한턱낼테니 우리 만날까! 
 
 
20230524, 솔물새꽃의 남도일기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