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우리 자신을 잊어야 다른 세계를 제대로 알 수 있다!
‘움벨트Umwelt’ , 모든 존재는 자기 자신만의 움벨트를 가졌다.
우리는 한 세계에 다가가려면 자신의 움벨트를 잠시 내려놓아야 한다. 다른 사람의 눈으로 세상을 봐야한다.
동물들의 눈으로 본 인간 세상은 어떠할까? 너구리와 비둘기가 본 세상과 인간은 어떠할까? 우리가 저들을 보며 뭔가를 생각하듯이 저들도 인간을 보고 있을 것인데.... 자못 궁금해진다! 인간은 이제 자신만의 눈으로 자연과 하늘과 동물과 새들과 꽃들의 세상을 해석하고 판단하려는 성급함을 내려놓아야 한다. 제주도 모슬포 산이수동 <바다, 마르마레> 레스토랑 창가에서 눈 뜨는 형제섬은 나를 흔들어 깨우면서 늘 속삭인다. 서로 다른 '움벨트'를 기억하라고! 다른 사람의 눈으로 세상을 한번 바라보라고!
<동물과 인간 세계로의 산책>을 집필한 야곱 폰 웩스쿨(1864~1944)은 동물이 경험한 주변의 생물 세계를 나타내기 위해 ‘움벨트Umwelt’라는 개념을 만들어냈다. 모든 생명체에 의해 동시에 동일하게 경험되는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모든 생명체가 각기 다른 ‘움벨트’를 가졌기 때문이다.
생명을 지닌 모든 존재는 서로 다른 ‘움벨트’로 살아가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와 다른 세계(사람이든, 동물이든, 식물이든)에 다가갈 때면 조심스럽게 서서히 자신의 관점과 자신의 척도를 내려놓고 다가가야 한다. 자신의 선입견이나 생각을 내려놓아야 한다. 그러려면 인내와 침묵은 필수적이다. 우리는 서로가 다른 ‘움벨트’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웩스쿨은 '움벨트'가 다른 세계에 가까이 다가가려면 잠시 나 자신을 잊어야 한다고 설득한다. 자신의 판단이나 경험 기준을 내려놓아야 한다고, 남의 눈으로 세상을 보라고 줄기차게 요구한다. 연인들의 다툼이나 부부 싸움은 거의 대부분 문제를 자기 관점에서 바라보려는 옹졸함에서 시작된다. 서로 다른 '움벨트'의 차이를 인정하면 갈등은 쉽게 풀어낼 수 있을지 모른다.
시간과 공간에 대한 개념 또한 모든 동물들에게 동일한 것이 아니다. '천년'을 물속에서 애벌레로 지내다가 성충이 되면 겨울 하루 남짓 살고 죽는 하루살이에게는 어느 기간이 더 중요할까? 땅속에서 굼벵이로 십수 년을 살다 나오는 매미는 도대체 어떤 시계를 갖고 있을까? 사람들은 신, 생명, 우주의 근원은 시간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것으로서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건 어쩌면 지극히 인간 중심적인 사고의 결과일지도 모른다. 시간과 공간은 물론 자연의 모든 일은 다 상대적이다. 우리 인간은 대단히 시각적인 동물이다. 그러나 개미를 비롯한 이 지구 상의 수많은 동물은 대부분 후각에 의존하여 살아간다. 그러므로 인간의 생각과 감각을 고수해서는 인간이 아닌 다른 동식물의 세계를 결코 이해할 수 없다. 인간의 시공간에 대한 감각적 경험과 개미나 매미의 시간과 공간에 대한 인식은 다르다. 결코 인간의 시간과 진드기의 시간 인식은 동일한 것이 아니다. 각기 다른 움벨트를 가졌기 때문이다.
‘움벨트’라는 개념을 잘 이해하면
오늘날 우리 사회의 수많은 갈등과 반목의 원인이 무엇 때문인지 금방 알게 될 것이다!
내가 이 책을 읽지 않았다면 '움벨트'라는 말을 어디서 들을 수 있었으랴, 다른 세계를 향한 낮아짐을 어디서 배울 수 있었으랴, 인간 중심적 사고의 위험을 어떻게 알아챌 수 있었으랴,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는 각기 그들만의 '움벨트'가 있을진대, 그 움벨트의 차이와 특성을 외면한 채 나의 생각 나의 판단 나의 해석만을 정당하다고 고집한다면 차별과 전쟁과 지배와 억압의 악순환만 반복할 것이다.
‘책을 읽는 일’은 ‘생각하는 일’이요, ‘소통을 잘하는 일’이다. 책을 읽는 일은 나와 다른 '움벨트'를 가진 고매한 석학과의 만남이다. 그 석학의 인생과 인식과 경험과 깨달음까지도 내 안으로 들이는 일이 독서다. 책을 읽는 일은 어찌 보면 아주 극적인 교감이다. 책을 쓴 저자와 그리고 책 속의 내용과 영적 만남을 이루는 성스러운 순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누군가의 고상한 저작을 읽을 때면 먼저 나를 비워내야 한다. 나의 좁은 앎과 지적 인식과 선입견을 내려놓고 나를 정결히 비워내야 한다. 낮아져야 한다. 철저히 나의 완고한 지식을 잠재워두고 새로이 책과 만날 수 있어야 한다. 책을 읽는 일이나 산을 찾는 일, 누군가를 만나는 일, 낯선 곳을 여행하는 일은, 항상 나를 비우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 나를 비우고 가볍게 하여 나를 채워서 다시 돌아오는 길이어야 한다.
책을 읽는 일이나 산문에 들어서는 일은 '나'의 경건한 수행의 과정인지 모른다. '나'를 비우고, '나'를 죽여야 다른 세계를 내 안에 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매일매일 내가 죽어야 새로운 자아로 거듭날 수 있는 까닭이다. 한 마리 애벌레 같은 존재가 나비로 부활하는 일은 분명 오랜 기다림과 자기 부정이 필요하다. 그래서 누군가는 하루하루 사는 길이 바로 수행이라고 하였다. 인생은 죽을 때까지 수행인지 모르겠다.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
이젠 '나'를 살아야 한다. '나'로 살아야 한다.
진정한 '나'의 주인으로 당당하게 살다가 이 지상을 떠나야 한다.
이제까지 길이 '삶'을 위해 '나'를 포기하고 살아온 인생이었다면
지금부터는 '나'의 주인으로, 단 한번 뿐인 인생의 주인공으로 살아야겠다!
삶도 죽음도 나의 존재의 핵심이다. 죽음을 아는 일이 삶을 더 사랑하는 일이다.
지금부터는 '죽음'을 위해, 아름다운 '죽음'을 위해, 영원한 '나'의 구원의 길을 위해,
진정한 '나'로 사는 길을 고집해야 하지 않을까,
나이들수록 아름다운 '나'로 살아야 하지 않을까,
이제라도 돌아갈 길을 예비하며 살아야 하지 않을까,
헛되고 헛된 미혹에서 벗어나 '나'의 진정한 주인이 되는 길을 가야 하지 않을까,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
이 경구의 함의를 이제야 알 것 같다. 참 오래도 걸렸다.
노을처럼 꽃처럼 물처럼 솔처럼 새처럼 매일매일 아름답게 스러지며 새 부활을 기다리며!
자연스럽게 절로절로 살다가 영원한 본향으로 아름답게 돌아갈 날을 기다리며!
(20231016, 솔물새꽃의 오금동일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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