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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생각하기 위한 독서

꽃무릇, 네 눈동자 속에서 살고 싶어라!

by 솔물새꽃 2023. 9.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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뜬금없이 오금동산 으슥한 풀숲에 핀 꽃무릇을 보고 깜짝 놀랐다, 여름이 남겨준 이 아름다운 축복의 선물을...!
뜬금없이 오금동산 으슥한 풀숲에 핀 꽃무릇을 보고 깜짝 놀랐다, 여름이 남겨준 이 아름다운 축복의 선물을...!


해지는 서쪽이 애닲은 가을이 곁에 와 있다.

석양 노을이 서러운 그리움이 온 것이다.

 

빗소리에 젖은 풀벌레소리는
까닭 없이 철없던 시절의 우수를 선명히 펼쳐 놓았다.
이제 어디에서도 지난 계절의 매미 우는 소리를 더 이상 들을 수 없다.

그 무덥고 뜨거웠던 긴 여름이 다 가고 새 가을 손님이 오신 것이다.
 
그리할지라도 한 계절이 지나간 자리마다 그 흔적은 남는 것일까,
나무의 나이테처럼 얼굴에 팬 세월의 자국처럼 마음에 어혈瘀血처럼,

아마도 너와 나의 삶의 길도 그러하지 않았으랴,
아무리 무심하게 살아온 길이었을지라도 돌아보면 어딘가 그 음영은 남는다.
 

자칫 어디 한눈팔다가 이 귀한 꽃무릇을 못 보고 말뻔했다! 서러운 나의 마음을 알고 여름이 남겨둔 이 귀한 선물을...!
자칫 어디 한눈팔다가 이 귀한 꽃무릇을 못 보고 말뻔했다! 서러운 나의 마음을 알고 여름이 남겨둔 이 귀한 선물을...!

 
우리가 살아온 길은 누군가를 더 사랑하기 위하여 흘린
땀과 눈물이 스민 길이었다고 이젠 고백하며 살기로 하자,
 
곰곰 생각해보니 여름을 건너오면서 우리가 흘린 끈끈한 땀방울도,
중구난방 요동하는 풍랑의 세상을 아파하며 탄식하며 몰래 흘린 눈물도,
알고 보면 세상을 사람을 그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이 아니었으랴,

 

우리의 바탕을 흐르는 눈물 젖은 이 사랑의 꽃이 한 세상 맑히는 강물이 아니랴,
우리의 바탕을 흐르는 눈물 젖은 이 사랑의 꽃이 한 세상 맑히는 강물이 아니랴,

 

우리가 흘린 이 눈물이 한 세상 맑히는 강물의 원천이 아니랴,

그 비원의 눈물이 누구를 위한 것이랴,
너와 나의 영토를 아끼는 마음이 아니랴,
너와 나의 가슴 속 은밀하게 키워온 꿈들이 이루어지는 날을,
등불처럼 길 밝혀 줄 어느 좋은 날을 기다리는 마음이 아니었으랴,

 

이제 그만 아파하자! 이제 그만 아파하기로 하자! 우리가 아파한들 그 누가 감싸 안아주랴!

너와 내가 어차피 가야 할 길이라면 주저하지 말고 스스로 나서보자. 내 육신의 허물과 부스러기와 영혼의 고뇌와 아픔이 고스란히 가을이 오는 길에 노둣돌이 되는 것을 이제 믿기로 하자. 어찌 그 길이 따뜻하고 눈물겹지 않겠는가, 이제 그만 아파하자, 서러워 몰래 흘린 눈물도 이제 그만 거두기로 하자, 흐르고 흐르다 보면 바다에 닿는 날도 있으리,
 

꽃무릇아, 꽃무릇아, 지긋이 바라보며, 그 꽃잎 속을 건너오는 그리움에게 속삭이듯, 고맙다, 고 고백하였다!
꽃무릇아, 꽃무릇아, 지긋이 바라보며, 그 꽃잎 속을 건너오는 그리움에게 속삭이듯, 고맙다, 고 고백하였다!

 
여름이 지나간 길목 동산 풀숲에는 꽃무릇이 피어있다.
나는 오늘에야 나의 여름과 비로소 작별하려 한다.
 
지난 여름은 무심하게 그냥 그렇게 떠나지 않았다네. 무정한 세월이라고 원망만 하고 있을 일이 아니네, 여름은 한때 머물던 자리마다 가을을 예비해 놓고 떠난 것이지. 여름을 용케도 건너온 우리를 위해 아름다운 선물을 남겨두고 떠난 것이네. 잣나무 그늘에 꽃무릇을 살짝이 피워두고, 가을 꽃무릇을 피워두고 먼 길 떠난 여름의 마음, 그 마음이 가녀린 꽃무릇처럼 아름다워 오늘은 가을비 내리고 있네!
 
함평 용천사 일주문 오르는 길 꽃무릇 천국을 맘으로만 맘으로만 그리며 마음 다잡고 있었는데, 여름은 이 작은 동산에도 꽃무릇을 두고 간 것이네! 나는 비로소 여름을 떠나보내려 하네. 이 꽃무릇 눈시울에 이슬 반짝이는 것을 지긋이 바라보려 하네,
 
여름아, 잘 가, 정말 고마웠어! 꽃무릇아, 나는 네 눈동자 속에서 살고 싶어! 꽃무릇아, 나는 네 눈동자 속에서 살고 싶어! 그 꽃잎 속을 건너오는 그리움에게 오래도록 속삭이듯 고백했다네.
 

꽃무릇아, 나는 끝끝내 네 눈동자 속에서 살고 싶어, 살고 싶어, 되뇌어 들려주었다!
꽃무릇아, 나는 끝끝내 네 눈동자 속에서 살고 싶어, 살고 싶어, 되뇌어 들려주었다!

 

<나는 네 눈동자 속에서 살고 싶어>

 
나는 네 눈동자 속에서 살고 싶어
네 눈이 보는 것을 나도 보고
네 눈에 흐르는 눈물로 나도 흐르고 싶어
어쩌다 웃고도 싶어
밤이면 네 눈 속에 뜨는 별처럼
나도 네 눈 속에서 별로 뜨고 싶어
 
간혹 꿈도 꾸고 싶어
네 눈 속에 꿈꾸는 길이 있으면
나도 네 눈 속에 꿈꾸는 길이 되고 싶어
끝없이 걸어가는 길이 되고 싶어
 
어쩌면 그 길에서 나그네도 보겠지
그러면 나도 네 눈 속에서
먼 길을 걸어가는 나그네가 되고 싶어
풀밭에 주저앉아 가끔가끔 쉬어도 가는
 
나는 네 눈동자 속에서 살고 싶어
네 눈이 가리키는 방향을 나도 보고
네 마음의 풍향계도 바라보고 싶어
저기, 키 큰 미루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는군
 
네 눈 속에는 바람이 지나고 있어
나도 네 눈 속을 지나는 바람이고 싶어
네가 보는 것을 나도 볼 수 있지
왜냐하면 나는 네 눈 속에서 살고 있으니까
 
네 눈 속에는 멧새가 살고 있어
갓 움이 돋은 고란초도 살고 있어
그날은 비 갠 오후 저녁때
네 눈동자 속에는 무지개가 걸려 있었지
 
나도 네 눈동자 속에 무지개로 내리고 싶어
그리하여 네 가장 아름다운 젖무덤에
어린양처럼 유순한 코를 박고
이 세상 가장 아름다운 꽃잎의 모습으로 죽고 싶어
 
나는 끝끝내 네 눈동자 속에서 살고 싶어
 

꽃무릇아, 네 눈 속에는 바람이 지나고 있어, 나도 네 눈 속을 지나는 바람이 되고 싶어!
꽃무릇아, 네 눈 속에는 바람이 지나고 있어, 나도 네 눈 속을 지나는 바람이 되고 싶어!

 
<박정만 시집, 꽃지는 저녁은 바라보지 말라>에서 전문 인용.
 
 
20230915, 솔물새꽃의 오금동산일기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