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린 시절 소꼴을 베러 강둑으로 나갈 때가 잦았다.
이때면 반짝이는 은빛 물비늘 흐르는 강물과 아청빛 아득한 하늘과 흰구름에 흠뻑 젖어들었다.
꼴망태에 소꼴을 채우는 것도 잊고 강둑에 앉아 하늘을 보고 강을 바라보는 것이 그냥 좋았으리라.
탐진강의 일생이 다 끝나는 구강포 너머
만덕산에 저녁노을이 붉게 타오를 때가 되면
어둑한 땅거미를 이끌고 새들과 함께 대나무 숲이 깊은 마을로 돌아오곤 하였다.
낮에 본 강물과 하늘과 흰구름이 내 안에 하도 가득하여 밤이면 뒤척일 때가 많았는데,
키가 자라 대처 고등학생이 된 후, 도서관에서 헤르만 헤세의 ‘흰구름’을 찾아 읽었을 때!
나는, 나의 영혼이 긴 잠에서 깨어 훨훨 날고 있는 꿈을 꾸고 있는 것을 느꼈다.
알을 깨고 나와 처음 빛을 본 새의 황홀함처럼 감탄과 호기심으로 마냥 환호하며 날고 싶었다.
그의 시는 흰구름을 통해 인간의 애수와 떠도는 존재의 외로움을 노래하였는데,
어린 시절 강 언덕에서 하늘과 흰구름을 보며 품었던 나의 그 마음을 고스란히 담은 시였다.
얼마나 놀라운 우연의 만남인가! (그 이후로 헤르만 헤세는 내 영혼이 지향하는 등불이 되었다.)
그날 이후, 시의 씨앗이 내 안에 뿌려져 빛 보기를 기다리며
늘 나의 곁에서 나를 채근하고 있었던 것이다.
천년 아라 홍련의 씨앗처럼 시의 꽃을 피우길 갈망하고 있었다.
이 가을, 헤세의 '흰구름'을 다시 암송하고 싶다!
(시든 수필이든 노래든, 친구나 가족들이 보내온 글이든, 아니면 산이나 바다나 섬은 자주 여러 번 읽고 듣고 보고 느끼고 오래 머물러 보아야 그 시와 글과 노래와 편지의 글이, 산과 섬과 바다가 내 안에 들어와 나의 숨결이 되고 드디어 하나가 되는 영적 합일을 누릴 수 있다. 어떤 세계(대상)와 하나가 되려면 여러 번 만나야 한다. 자주 읽고 듣고 보고 느끼는 친밀한 만남이 있어야 온전히 알 수 있다. 나의 마음을 먼저 열어야 하는 까닭이다.)
오, 오, 보라,
잃어버린 아름다운 노래의 나직한 멜로디처럼
흰구름은 다시 푸른 하늘 먼 곳으로 흘러간다
기나긴 방랑의 여로에서
나그네의 방황과 슬픔과 기쁨을 한껏 맛본 자가 아니고는
저 구름의 마음을 알지 못하리니
나는 태양과 바다와 바람과 함께
하얀 것, 정처 없이 흐르는 것들을 사랑하나니
고향을 떠난 나그네에게는
이것들이 정다운 누이들이며 천사이기 때문이라
(흰구름 – 헤르만 헤세)
내가 시를 떠나지 못하고 결국 늦깎이 시의 길로 뒤늦게 돌아온 이 이야기를
나는 지금까지 어디서도 말한 적이 없다.
오늘에야 수줍은 이 고백을 비로소 토로한다.
이순耳順이 훌쩍 지나도록 나에게 굳게 닫혀만 있던 시의 길이 열린 낯선 인연을...!
포기하지 않고 기다린 자에게 찾아온 하늘의 위로 같은 감동이다.
이제야 시의 강에 남은 내 생애의 한 줌 눈물을 뿌릴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아직 나는 시가 무엇인지 잘 모른다.
나는 시를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는 시인이 아닌지 모른다.
그냥저냥 강물처럼, 흰구름처럼, 흐르며 다문다문 시를 지으며 암송하며 살고 싶을 뿐이다.
꽃과 새와 물과 솔과 들풀이 하는 말을,
산이나 강이나 섬이나 하늘이 나에게 속삭이는 말을
받아 적어볼까, 할 뿐이다. 노자가 말한 '아자연我自然'이 맞을 게다.
그냥 절로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자연의 내밀한 숨결을 듣고 싶었다.
나는 이 일을 위해 나의 이 자연의 벗들과 더 친해지려 늘 함께 할 것이다.
내가 산을 자주 걷듯이 바다나 강을 따라 흐르듯이 새와 물과 꽃과 즐기듯이
나의 글은 산취 물씬할 것을 믿는다!
시의 완성이 어디 있으랴,
시의 무게를 저울질할 수 있는 눈금을 이 세상 누가 갖고 있단 말인가,
늘 미완의 완성을 위해, 순결한 영혼의 쉼을 위해, 시를 사랑하는 것이다.
여전히 오늘도 시혼은 시의 강으로 흐르고 있을 것인데,
오늘도 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진실과
눈에 보이지 않는 아름다움과
눈에 보이지 않는 더 큰 세계를 향한 동경을
포기하지 않는 지구별 여행자로 길 떠나려 한다.
20230908, 오금동커피에서 솔물새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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