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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수필쓰기

가을 빗소리

by 솔물새꽃 2024. 9.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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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데서 가을이 오려는 것일까...!


가을 빗소리
 
 
벗이여!
지난밤 잠을 거의 못 자 이제야 잠자리에서 일어나려 하네.

내리는 빗소리가 하도 좋아서 하도 반가워서
문 열어두고 선선한 가을 빗소리를 듣느라 깊은 잠을 못 잔 탓에...
 
우리 도원이랑 싱그러운 가을바람과 빗소리의 감촉을 즐기며 어린아이에게 계절의 감관을 열어주며 끝말잇기 놀이를 하느라고... 가끔 오금동에 와서 잠을 잘 때면 늘 이부자리에서 뒹굴며 말똥말똥 눈알을 별빛처럼 굴리며 이것 하자, 저것 하자며 잘 자지 않고 할아버지한테 놀아 달라고 보채거든...


다문다문 띄엄띄엄 자모음의 징검다리를 건너며 가을밤의 강을 건넌다!


"도원아~ 빗소리 들리니, 빗소리 참~ 좋지, 귀뚜라미 풀벌레 소리도 들려, 응~ 들려, 할아버~ 빗소리도 좋아~! 이게 가을이 오는 소리란다...! 할아버지 가을이 뭐야~, 가을이 무슨 소리야~!"

이렇게 다문다문 띄엄띄엄 이어지는 가을밤 이야기, 간간이 빗소리와 징검다리를 건너는 자모음의 낱말놀이, 긴 여름을 건너온 비오는 초 가을밤, 어린 손자와 나누며 고르며 쓰다듬으며 웃으며 듣는 풀벌레노래, 살갑게 손자의 체온과 인정과 감성의 화음을 맞춰보는 빗소리 내리는 가을밤의 서정抒情...


달밤 동산에 오르면 가냘픈 풀벌레 우는 소리에 깊어가는 가을의 깊이를 느낀다!


벗이여!
어느 사이 세월은 여전히 흐르겠지...,
할아버지와 손자의 세월의 길은 벌써 뿔뿔이 갈라져 서로의 길로 따로 흐르고,
우리 도원이도 장성한 한 그루 나무로 서 있을 때가 오면,
그때가 낯선 그림자처럼 불쑥 도원이에게 찾아오면, 그때가 오면,
가을을 부르는 소슬바람과 풀벌레의 노래와 내리는 빗소리를 듣는 밤이 우연히 우리 도원이에게 다시 오면, 다시 온다면...

지난밤 우리가 함께 만난 비오는 가을밤을 이야기할까,
할아버지 품에서 놀았던 식지 않은 가슴의 체온을 다시 기억할까,
흐르지 않고 머물러 있는 세월의 깊이를 알 수 있을까,
할아버지랑 만났던 빗소리와 풀벌레소리와 낱말놀이의 어느 가을밤이 혈관 속을 흐르고 있음을 느끼며 살고 있을까,


가을가을 가을을 그리는 가슴마다 꿈이 탐스럽게 영글기를 빈다!


벗이여!
이렇게 하룻밤 사이 내리는 빗줄기에 긴 여름강이 바다로 떠밀려 흐르면 가버린 긴긴 여름은 無爲의 자유, 새와 구름의 길처럼 흔적 없이 사라지고 말겠지.

새는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고 했지... 강물은 다시 거슬러 오르지 않는다고도 말했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진 지나간 여름날이 마치 우리의 인생길 같아 퍽이나 섭섭하다네,
여름은 가고 가을은 새로이 오고... 오가는 계절의 기찻길엔 어디 쉬어갈 만한 간이역 하나 없는 길...!

개미처럼 진땀을 흐르며 고군분투하며 참고 살아온 세월의 요추腰椎 두어 마디가 지렁이  몸뚱아리처럼 뚝 떨어져 나가 버렸다는 생각을 하니,
세월유수의 섭리가 참으로 가슴 쏙쏙 아리고 쓰리기만 하다네!


모슬포 산이수동의 석양 노을을 보내온 옛벗에게 긴 가을 편지에 나의 맘을 전하고 싶다!
한가위 달님이시여, 달님이시여, 먼 데 젖은 데 골골마다 우리들 마음 구석마다 비춰주소서!


벗이여!
우리는 무엇을 꽉 쥐려고 바둥거렸까...
무엇을 욕심껏 짊어지고 비틀거리며 예까지 왔을까...

이젠 빈 두 손 모아 쥐고
가을을 읽는 영혼의 언어를 정갈히 골라야 할 것이네!

우리 도원이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이심전심, 마음과 마음을 이어주는 빗소리 같은 눈물의 기도뿐이다!


20240921 오금동 골방에서 솔물새꽃(三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