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빛 영롱한 여름밤의 추억은 흐르지 않는 세월의 강을 반짝이는 윤슬이다!
(마침, 아침 일어나 페이스북 다정한 임형 선생의 글을 읽고 이 글을 엉성하게 단숨에 적어본다.)
어릴 적,
아마 예닐곱 살 때쯤의 기억이 맞을 거야?
시골에서 도회지 학교로 유학갔던
큰형이 고향에서 여름 방학을 보내고
떠나갈 때쯤 매미 우는 뒤 안 장독대로 작은형과 나를 조용히 불러
아버지께 받은 용돈에서 일 원짜리 지폐 몇 장을 떼어
나눠주고 대문을 나섰습니다.
이어서 큰형 했던 것처럼 어린 나이에 도시로 갔던 작은 형도 집에 왔다 돌아갈 때면
거북선이 반짝이는 크나큰 오 원(오십환)짜리 은전을 내게 주고 떠나갔습니다.
형들을 따라 오학년 때 도시로 온 나는
자나 깨나 그리던 고향에 가는 날이면
용돈을 아끼고 아껴서 산 25도짜리 네홉들이 삼학 소주를 신문지에 똘똘 말아 가방에 고이 넣어 먼지 풀풀 날리는 신작로길 덜컹거리는 버스에서 소주병이 흔들릴세라 품에 꽉 안고서는 고향의 주름살 많은 아버지 앞에 얌전하게 꺼내놓았습니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그리고 형들이 했던 대로 나도 첨성대 그려진 십 원짜리 지폐를 품에서 꺼내서는 동생 손에 꼭 쥐어주고 동구 밖 당산나무 길을 지나서 눈물 속에 도시로 떠나왔습니다.
아, 오늘처럼 매미가 울어대는 칠석 가까운 날이면 더욱 그리운 사람들입니다.
어쩌면 그렇게 고향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과 안쓰러운 마음이 애틋하였을까...! 간혹 나는 나의 마음에 물어보고 싶을 때가 있다. 너는 왜 그렇게 부모님에 대한 인정이 유별나냐고...? 너는 왜 그렇게 부모님을 그리는 마음이 깊었느냐고...?
유난히 유년의 기억을 생생하게 간직하며 평생을 살아온 나는 아버지와 어머니, 우리 가족사의 지난한 우여곡절의 길을 비교적 다른 형제자매보다 공감하는 부분이 더 많은 탓이었을까. 늘 어디에 살든지 고향 어머니와 아부지를 그리며 염려하는 마음을 단 하루도 잊어본 적이 없었다. 시골 부모님과 나눌 수 있는 통신수단이 거의 전무하였던 그 시절, 고향 부모님의 안부를 묻고 자식의 기별을 전할 수 있는 길이 오직 편지뿐이었던 탓에 일주이면 한 두 번은 늦은 밤 잠들기 전에 꾹꾹 눌러 해서체 큰 글씨로 사연을 적은 편지를 학교 가는 길 우체통에 넣고 학교에 가곤 하였다.
자식들을 위해, 집안 살림을 늘리기 위해 당신들의 일신의 안일과 영달을 눈곱만큼도 돌보지 않으신 희생과 헌신과 본능적인 사랑의 마음을 지키며 살아오신 우리 엄마 아부지... 결국 빈 껍데기로 둥둥 떠내려간 우렁이 사랑... 자식을 위해 당신들의 생을 통째로 다 바쳐버린 아버지와 어머니, 우리 어머니와 아부지의 거룩한 사랑!
여름 방학을 하면 나는 으레 2, 3일 고향에 다녀오곤 하였는데, 광주에서 버스를 타고 포장이 되지 않은 신작로를 먼지 풀풀 날리며 달려 강진읍네 터미널에 내리면 오일장이 서는 장터 입구 점포에 들러 집에 가져갈 물건들을 사는 것으로 분주했다. 동네까지 들어가는 마을버스가 자주 있었던 것이 아니어서 차를 떨구면 집에 가는 일이 영 막막한게 아니었다.
이날만은 나는 늘 아부지가 좋아하시는 보해 소주보다는 더 값나가는 정종을 사서 들었다. (늘 드시는 독한 소주보다는 값이 비싼 정종이 더 좋은 술인 줄 알았던 것이다. 단 한 번만이라도 더 좋은 술을 아부지께 사 드리고 싶었다. 아직 술에 대해 잘 모르는 나이라 정종 값이 소주보다 더 비싸서 좋은 술일 것이라 짐작했던 것이다.)
그다음 돼지고기찌개에 기름기 있는 고기를 안주 삼아 허기진 소증이라도 푸시라고(긴 하루를 들에서 보내고 집에 돌아오신 아부지께서 항상 부엌 살강에서 군둥내 나는 열무김치를 안주 삼아 사발에 소주를 부어 마시는 것을 본 적이 자주 있었던 터라...)
강진읍내 푸줏간에 들러 돼지고기도 몇 근 뜨고 콩비지와 두부도 사고, 어머니 몫으로는 달디단 간수메(포도 복숭아 통조림)도 사고 여름 과일인 복숭아 포도도 큰 봉지에 골라 담았다. (수박은 도저히 무거워서 덜컹거리는 버스로는 집에 가져갈 수 없었다.) 그리고 허드레 옷 파는 가게에 들러 가상하게 밤잠을 주무시라고 어머니 아부지 여름 모시 잠옷도 사서 챙겼다.
책가방이며 바리바리 장 본 물건들을 양손에 들고 마을 들어가는 버스를 해거름까지 기다려 집에 도착하노라면... 기다려 반겨주는 이 아무도 없는 텅 빈 집 마당... 그 고요하고 적막한 집... 돌담 밑 채송화와 박덩굴과 대문 앞 감나무와 닭장 가를 서성이는 닭과 오리들... 하루종일 호젓하게 주인을 기다려온 집 안 가득한 고적함이 슬그머니 일어나 나를 맞아주었다.
들에서 어둑한 땅거미들을 데리고 수척한 구릿빛 얼굴로 걸어오시는 부모님들... 지게 바작에 소여물 베어지고 소를 몰고 돌아오시는 아부지... 어머니는 왕버드나무 그늘 샘터에 들러 머릿수건으로 하루의 고단한 먼지를 털어내시고 뻐근하게 끊어질 정도로 아픈 허리를 편 후 물 양동이 머리에 이고 백구랑 돌아오셨다.
토방에 짐을 내려두고 저녁 이른 이슬을 털며 서둘러 들로 마중을 달려 나가노라면 멀리서 아들을 알아보시고 눈시울 젖어 내리는 눈물만 훔쳐내시며 "뭔 얼굴이 그렇게 말랐다냐..." 며 아들을 안쓰러워하셨던 엄마 아부지의 글썽이는 얼굴... 달도 없는 밤인데도 엄마와 아부지의 이마에는 큰 보름달이 반짝이고 있었다. 소도 백구도 아부지도 엄마도 풍경소리도 샛별도 밭고랑 사이 수숫대도 나도 서로 좋아서 절로 좋아서 마을 앞 등을 넘어 집으로 돌아오곤 하였다. 그 논두렁 길 구불구불한 밭고랑 길이 왜 이리도 걷고 싶은 것일까....!
어머니는 분주히 한 데 솥에 불을 때 가며 큼직하게 칼질한 돼지고기 국물 안주를 만들어 내셨고, 귀한 정종에 아들 이바지 자랑하며 맛보인다고 골목 친분이 두텁고 이물 없는 어르신 몇 분 모셔오라고 나를 심부름 보내셨다. 마당에 멍석을 펴고 어머니가 술상을 차려내시면 아부지와 이웃 어르신은 얘기꽃을 피우며 주거니 받거니 술잔을 돌리셨고, 양푼에 둥둥 뜬 별빛이며 손가락 만한 돼지고기를 건져 올리며 기막힌(?) 술안주와 정종으로 달콤한 여름밤 소증과 회포를 푸셨던 것이다. 은하수 흐르는 여름밤이 깊어 가는 줄도 잊으신 채, 하루의 고단함과 가슴의 애환을 씻어내리셨던 것이다.
나는 그분들 곁에서 모깃불도 피워드리고 소여물도 퍼 주고 백구 밥도 챙겨주며 간간히 묻는 말에 짧고 싱거운 대답을 건성으로 받아넘기며 졸음을 쫓아내곤 하였다. 여물 되새김하는 소도 닭장의 닭들도 백구도 졸음이 깊어갈 때까지, 여름밤 은성殷盛한 은하별들은 지칠 줄 모르는 초롱한 눈빛으로 지상의 잔치를 즐거워 하는 것 같았다. 아버지는 흡족해하시며 변변찮은 자식들 자랑도 늘어놓으시며 여름밤의 세레나데를 어르신들과 즐기셨던 것이다.
그 아늑했던 여름밤의 풍경들... 얼굴들... 강물처럼 흘러갔던 이야기들을 어찌 이 여름이면 기억하지 않으랴. 여름밤 별이 된 사연들을... 아직도 흐르지 않고 나의 가슴에 새록새록 피어나는 여름밤의 별꽃들... 지금은 진즉 다 사라져버린 전설 같은 얼굴들이, 우주 진공 속 막막한 시간이 되어버린 별빛 같은 이야기들이, 지붕 박꽃처럼 피어나는 여름밤의 아득한 풍경들이 무척이나 그리울 뿐이다! 살아가는 것은 이처럼 아픔이기도 기쁨이기도 눈물이기도 하는 것일까.
(누나들이 다 출가하고 난 후 동생 셋이랑 나는 대처로 나가 학교에 다녔는데... 일찍이 집에는 어머니 아부지 두 분만 쓸쓸하게 사셨다.)
임형 선생의 인정스러운 서정시 같은 얘기를 읽고 다시 읽노라니 어린 시절 그 여름날 나의 풍경이 달처럼 선명히 떠올라 푸념처럼 긴 사설을 늘어놓고 말았다. 길게 용서를 구하는 마음이다...!
그러나 어찌하랴, 이 여름 염천의 폭염 가운데서도 새록새록 피어나는 달콤한 여름밤의 추억이 별빛처럼 쏟아져 내리는 것을 어찌 막을 수 있으랴...!
당신들은 못 배우셨지만 자식들은 가르쳐야겠다고
자식들을 객지 대처로 일찍이 다 보내놓고
허리 펼 참 없이 땅을 일구시고 씨뿌리며 오직 하늘과 땅만 믿고 사셨던 부모님.
내가 쓰는 용돈이 모두 어머니 아부지 피와 땀이 밴 귀한 목숨 같은 돈이었겠으나... 꾸깃꾸깃 장판 밑에 아껴 숨겨뒀다가 일 년에 두어 번씩 방학하여 시골 갈 때면 부모님을 위해 알뜰히 쓰고 싶었던 나의 마음...(얼마나 그 마음이 갸륵한가... 그때의 나를 꼭 안아주고 싶다...그때의 순결한 마음을 지키며 세월의 강을 건너고 싶다... 부모님의 은혜를 어찌 다 감당할 수 있으랴, 그리해도 나는 부모님 속은 크게 썩히지 않았다고 자부하고 싶을 때 가끔 있다...)
그리고 몇 날이 훌쩍 지나 다시 대처로 돌아올 때면 출출하실 때 동네 강생이 주점에 나가 아부지 대포 한잔씩 하시라고, 엄마는 강진읍 저재에 나가 간간한 깡다리랑 목포먹갈치 장 봐서 조려 드시라고 토방마루 아부지 엄마의 까만 고무신 안에 백 원 오십 원 십 원짜리 지전을 몰래 숨겨두고 동네 마을 회관으로 달려가 읍내 나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버스 창가를 스쳐 지나간 우리 어머니 아부지는 버스가 다리를 건너고 강생이를 지나 호롱동으로 들어가는 모퉁이를 지날 때까지... 눈에서 버스의 잔영이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며 나무처럼 서 계셨다. 그 그림자가 가슴에 사무치도록 그립다. 깊고 푸른 석양 노을처럼 타오르는 그리움! 어쩔 수가 없다. 그냥 꼭 품고 살 수밖에...!
흐르지 않는 별빛 영롱한 추억의 강, 모깃불 푸른 연기 지붕 하늘로 피어오르는 여름밤의 멍석 깔린 깊은 마당, 대나무숲 우듬지 햇살은 사각이고 매미 우는 소리 무성한 여름이면 더욱 그립다. 그 구릿빛 얼굴에 반짝이던 하얀 웃음꽃 이야기꽃 별꽃은 어디서 다시 피어나고 있을까.
그리움이 사무치게 밀려오는 틈으로 막바지 매미의 사랑 노래는 무심한 아침 햇살 사이로 절로 흐른다.
20240809 오금동 우거에서 솔물새꽃 삼규 (단숨에 적은 글이라서... 엉성하게 비틀거리는 갈짓자 문장들을 용서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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