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길에서 새소리를 듣는 일처럼 즐거우랴,
새들이 부르는 노래의 선율에 마음을 실으면 어느새 나는 새가 되고 숲이 되고 솔바람 되어 훨훨 산을 날고 있는 것을 느낀다. 호젓한 미명의 산길에서 아침을 부르는 동고비와 동박새와 직박구리의 날갯짓과 청신한 노랫소리는 얼마나 평화롭고 싱그러운 울림인가, 계곡의 맑은 물소리와 화음을 이룬 새들의 노래를 들으며 숲길을 걷노라면 나는 어느새 이 세상으로부터 멀리 유폐된 은일지사(?)가 된 기분에 사로잡힌다. 그래도 마냥 좋다. 이 외로움과 고독의 절정에 다다라보는 일은 산문을 들고나는 나의 즐거움이요 기다림이요 보람인 까닭이다.
이 세상 생명이 있는 존재 가운데 산처럼 요동 않고 진실하며 의롭고 선한 자비와 아량을 품은 크고 넓고 깊은 존재가 어디 있으랴,
이뿐이랴, 동터오는 산의 품에서 일어나, 골짜기를 타고 유유히 날아오르는 산안개를 바라보는 일은 얼마나 황홀한 유혹인가, 선학처럼 살포시 하얀 모시 날개를 펴고 초월을 준비하는 산안개, 금강송 푸른 봉우리에 앉아 옷매무새를 고르듯 피어나는 산안개의 형상을 보고 있으면 우화등선羽化登仙, 나도 모르게 훌훌 하늘을 나는 나비를 꿈꾼다. 이 묘연한 자연 무위의 아름다움 앞에 뇌쇄惱殺 당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어찌 산문에 드는 뜻이 질주하듯 산 꼭대기에 도달하는 데만 있으랴, 산의 정취에 젖어보고 싶은 감흥과 마음 여백에 담고 싶은 산의 형상을 그려보지 않고서야 어찌 산을 만났다고 말할 수 있으랴,
하늘을 쳐다보고 깊은 협곡의 바위틈마다 뿌리 서린 금강송을 바라보는 일, 그리고 꽃을 만나고 새소리와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며 느림느림 교감하는 것은 나의 산행의 큰 취지趣旨이다.
이 유유자적한 마음의 소요유를 누리기 위해 나는 산문에 자주 든다. 이 세상 어디에서도 산이 베풀어주는 큰 가슴 큰 아량을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때를 알고 속삭이듯 나를 부르는 나의 산을 생각하면 얼마나 감사한지 눈물만 흐를 따름이다.
이 땅에 내가 자주 찾는 지리산과 설악산과 한라산, 그리고 서울 근교 북한산과 도봉산과 불암산, 멀리 남녘 월출산과 무등산과 덕룡산과 주작산 같은 명산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얼마나 큰 자랑이요 과분한 축복인지 모른다.
나는 하늘이 이미 내게 베풀어놓은 이 놀라운 축복을 가능하면 오래오래 누리려는 마음이다. 이 일이 유한한 인생의 즐거운 낙樂인 것을 아는 까닭에 이 즐거움을 실천궁행 누리며 사려는 것이다. 하늘은 나의 뜻을 읽었을까, 그래서 산문에 들 때마다 가장 연약하고 무능하고 무지하고 가난하고 사소한 존재인 나에게 산은 항상 크고 담대한 가슴을 허락하여 나를 감싸주고 지켜준다. 나에게 한없는 은혜와 사랑을 베풀어준다.
특히 해와 달이 갈수록 형형색색 천태만상의 형상으로 피고 지는 꽃들이 베풀어주는 은혜를 생각하면 말로 형언할 수 없다. 우주와 자연의 길과 아름다움의 미학, 그리고 시적 영감까지 꽃은 다양한 함의를 추론할 수 있는 길로 나를 인도한다. 그래서 산길에서 꽃과 눈이 마주치면 쉬이 스쳐 지날 수 없다. 밤하늘 뜬 별이 하늘의 꽃이라면 대지 위에 철철이 핀 꽃은 지상의 별인 것이다.
그러므로 호젓이 핀 꽃들에게 자연스레 마음과 눈길이 오래 머문다. 나이 탓만은 결코 아니리라, 세월이 갈수록 생명의식이 깊어지는 것을 느끼는데, 이 지상의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고유한 빛깔과 향취를 품은 유일무이한 꽃이라는 생각이 늘 흐른다.
눈망울 말동말동한 해맑은 꽃의 눈빛이 나의 시선에 닿으면 도저히 그냥 외면할 수 없다.
보드랍게 미소 짓는 꽃의 눈망울을 지긋이 바라보며 꽃과 속삭여 보아라, 오래 꽃을 보고 있으면 꽃의 마음 저류에 닿을 성싶지 않겠는가, 아무리 사람들이 무심하고 자연의 흐름을 훼방 놓을지라도 계절의 매듭마다 때를 알려주는 이 성실한 꽃의 성품들, 순결한 자연의 성정을 포기하지 않고 때를 따라 변덕 없이 찾아와 기다려주는 초롱꽃의 순후한 지절! 이 꽃만 한 기다림과 헌신을 그대는 어디서 받아본 적 있는가? 어찌 금강초롱 꽃망울 속에 들고 싶은 마음이 일지 않으랴,
작년(2022) 7월 26일 설악 대청봉 가는 길목에서 만난 금강초롱꽃을 금년에도 다행히 (다른 데서) 만날 수 있었다. 지난해는 바위 기슭 어디쯤에 핀 꽃망울 탐스러운 자줏빛 금강초롱을 만났었는데... 섭섭하게도 아주 섭섭하게도 작년에 핀 그 자리엔 금강초롱이 없다. 벌써 핀 흔적도 없고 필 꽃망울도 보이지 않는다...ㅜㅜ 오가는 산인의 발길에 밟혀 목숨을 지켜낼 수 없었을까... 대청봉 여기저기 개체수는 조금 늘어난 것 같았지만 갈수록 꽃대롱이 가냘프고 연약해 보여 애달픈 마음 금할 길 없었다. 내년엔 더 왕성하게 번성하길 빌고 빌며 금강초롱 꽃망울을 마음에 고이 담아 돌아와야만 했다.
나는 산을 사랑하지만 이산저산 여기저기 여러 산길(다양한 등산 코스)을 결코 고집하지 않는다.
나름 나만의 믿음이 있다. 산은 내 집 앞이 아니다. 일 년이라고 해봐야 겨우 몇 번 가는 곳인데, 갈 때마다 산행코스를 바꾸다 보면 산을 자세히 잘 읽을 수 없다. 산을 잘 들여다볼 수 없다. 산을 잘 느낄 수도 없다. 그러나 한 길로 다니다 보면 물소리만 들어도 어디라는 것을 금방 알아챌 수 있다. 눈에 익은 길과 수목들과 기암절벽과 꽃이 피고 진 자리까지 해와 달, 歲月의 흐름이 여실히 다 보인다. 그래서 사람이든 음식점이든 산길이든 나는 바꾸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나의 발길을 오래, 자주, 늘 한곳에 집중하려 한다.
나는 한 길 한 사람 한 곳만을 고집하려는 경향이 있다. 다니는 길 만나던 사람 들르는 음식점은 허물없이 마냥 좋다. 나의 기억 나의 감각 나의 쌓인 인정을 되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자주 오래 만나다 보면 말이 없어도 이심전심 깊은 공감을 누릴 수 있고, 눈을 감고도 내가 지금 걷고 있는 이곳이 어딘지 알 수 있을 정도이니 얼마나 나의 오감이 편안하게 머물 수 있겠는가, 고향의 길과 엄마의 품이 아늑하듯이 눈에 마음에 익은 길은 마음이 절로 순편해진다.
그러다 보니 계절마다 해와 달이 흐를 때마다 기다리는 산의 마음을 쉬이 볼 수 있다. 산의 얼굴과 촉기의 흐름을 읽을 수 있고, 산길 어느 길목이든 기억에 남은 산의 인상과 형상과 추억이 기다리고 있어 산행의 묘미가 새록새록 꽃핀다. 혹 날이 저물고 눈비가 내려도 길을 알고 갈 길이 훤히 보이니 얼마나 아늑하겠는가, 대청봉 가는 길목에 핀 금강초롱꽃이 눈에 선하다. 그 꽃 속에 머물고 싶은 마음 일면 내 안은 짙은 자주색 금강초롱꽃 일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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