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하선경
연하선경, 이 길은
봄이 올 때나 가을이 저물 때면 늘 나의 마음에 우수처럼 그리워지는 길이다.
지리산에 수많은 길과 길이 있어 사람과 자연을 산과 산을 이어주지만
하늘 아래 이 평평하고 아늑하고 그윽한 연하선경 길,
결국 길이 하늘에 닿고야 마는 사방 훤히 뚫린 일망무애의 연하선경!
이 길이 촛대봉과 연하봉 사이에 평원처럼 펼쳐진 것은 아주 놀라운 일이다.
나는 가끔 이 연하선경 길을 만나기 위해 지리산을 찾는다.
이 길에서는 태고의 황홀恍惚한 우주의 시공을 체험하기도 하고
나비처럼 훨훨 날아 그 어떤 경계도 없는 대지와 하늘을 오르락내리락할 때도 있는 까닭이다.
여느 세월처럼 이곳에도 봄이 왔다 가고
어느 사이 늦은 11월의 그림자 내릴 때면
애틋한 그리움과 연민은 별빛처럼 나의 창가를 흔든다.
연하선경의 길이 겨울 속 긴 적멸의 강으로 서둘러 달려가는 것을
잠결에 보았기 때문이다.
이런 날이 밀물처럼 밀려오면
나의 마음은 벌써 지리산문을 기웃거리는 해거름 그림자가 되고 만다.
나는 틀림없이 꿈길을 가듯 연하선경과 제석봉 가는 길을 걷고 있다.
이때면 얼마나 좋은지 얼마나 또 서러운지
나는 그만 주저앉아 펑펑 울고 만다.
(지리산이든 설악산이든 월출산이든 불암산이든 호젓이 산문에 들어서면 그냥 눈물이 흐른다. 나도 모르게 울고 있는 나를 뒤늦게 알아볼 때가 있다. 산에서도 눈물의 강을 건너고 있는 것이다. 배척을 모르는 포용의 산, 차별과 냉소와 등급을 모르는 無等의 산, 경계와 담이 없는 무하유지향無何有之鄕의 산, 태고의 천예天倪를 간직한 산, 아늑한 엄마의 품 같은 산, 깊고 높고 드넓은 산의 품에 안기면 무엇이 걱정이랴... 무엇이 부러우랴... 지치고 힘들고 무겁고 부끄러운 몸과 맘을 있는 그대로 산문에 고백하고 나면... 나의 모든 죄악과 열등감과 탐심과 교만과 수치를 산의 품에 다 내려놓고 나면... 절로 나도 모르게 절로 하염없이 눈물이 흐른다. 알 수 없는 산의 사랑, 아낌없이 나를 돌봐주는 산의 사랑... 나도 잘 모르겠다... 인생의 희노애락오욕의 무게를 어찌 다 감당할 수 있으랴만, 산에서라면 나는 '인간'을 잊는다. '나'를 버린다. 산과 나는 더불어 하나가 되어가는 물아일체를 느낀다...산의 숨결이 나의 심장에 전해지는 것을 감촉한다.)
아무도 없는 연하봉에서 하늘 향해 목놓아 소리 지르다 내려오면
나의 가슴은 가벼이 한 마리 나비가 되고 만다.
무거운 마음은 가벼운 깃털처럼 훨훨 날아 오른다.
다시 봄을 그리며 다시 봄의 길을 기다리며 상상하며 설레며
서러움 스스로 다독이며 지리산과 오랜 작별을 나누고 나면
세상 남루한 누옥으로 돌아와야 한다.
산을 자주 찾는 나에게
산에 대한 무슨 호불호好不好가 있겠으며 산을 향한 청탁淸濁이 어디 있으랴만,
나에게 지리산의 연하선경 길과 제석봉 길은 내 영혼의 샹그릴라나 다름없다.
허점투성이인 완악한 내가 느림느림 민달팽이로 쉬엄쉬엄 지렁이로
환골 변신하는 성스러운 시간의 미궁 속으로 몰입하는 곳,
연하선경 가는 길인 까닭이다.
나의 존재에 대한 뜨거운 사랑을 회복하는 길이기도 한 때문이다.
(결코 호사스러운 수식이 될 수 없는 곳...
이 세상 어디서 이보다 더 순결한 자연을 만날 수 있으랴...
무위자연의 숨결이 흐르는 살아있는 생명의 연하선경.
나는 이 길에서라면 나의 죄악과 진부한 타성을 겨우 눈곱만큼이라도 씻어낼 수 있다...
인간처럼 불완전하고 연약한 존재가 없다는 것을 진즉 알고 있기에
나는 태고의 순결한 자연 앞에 서면 늘 부끄러운 맘 감출 수가 없다...
잠시라도 나를 맑히고 평정심을 회복해 줄 곳은 혼자 산을 걷는 시간이다!)
나는 이 길에서 민달팽이로 지렁이로
미음완보微吟緩步하는 가장 한가하고 아름답고 황홀한 시간을 누린다.
그러므로
이 길은 이 세상 어디서도 위로 받지 못한 아픈 나의 영혼이 안식을 누리는 길이다.
내 영혼의 아늑한 쉼터!
어찌 하늘에 닿을 듯 성스러운 시공에서 홀로 흐르는 눈물을 멈출 수 있으랴...!
20240523
백무동 옛고을산장에서 솔물새꽃(삼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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